"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열매를 맺는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현대 과학이 아무리 발달했다 해도 어떻게 하나의 밀알이 죽어서 그 많은 열매를 맺는지 인간의 지혜는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철학은「인간이 무엇인가」를 수천 년 동안 파헤쳐왔지만 왜 죽어야 만이 생명을 얻게 되는지를 여전히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세상은 그 의미를 알 턱이 없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의 밀알이 죽기 위해서는 흙 속에 묻혀 긴 밤을 지내야만 합니다. 그때는 희망도 보이지 않으며 어두운 절망만이 죽음을 더 고통스럽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 안에서 새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자기 몸을 찢고 깨뜨리는 참혹한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우리가 말하는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죽어야만이 참 생명을 얻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자 했던 것은 좀 이색적입니다. 아마 그분에게서 세상의 어떤 진리나 영광을 구하고자 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크게 환호하는 것을 보았던 그들로서는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세속의 영광에는 아랑곳 없이, 하나의 밀알이 죽어야만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 당신이 죽어야만이 많은 이들이 생명을 얻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죽음 자체가 당신께는 영광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거기에 세상과는 판이하게 다른 참 삶의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깊이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좋은 신앙을 가지고 세상을 거꾸로 사는 어리석은 인생이 됩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두 종류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첫째는 살기 위해서 죽는 사람들이고 둘째는 죽기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언뜻 듣기에는 똑같은 삶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차원이 다르며 천당과 지옥만큼이나 거리가 멉니다. 우선은 잘 사는 것 같지만 죽는 경우가 허다하며, 지금은 서럽게 눈물 흘리고 있지만 참 평화 속에 미래를 약속 받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 옳게 걸어야 할 길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어떤 자매가 시집 가서 고생고생만 하다가 불쌍하게 죽었습니다. 그녀는 남편 복도 없었고 자식 복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살림과 고약한 시어머니 밑에서 서럽게 살았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불평하지 않았으며 신세를 한탄하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섭리의 길처럼 착하게 믿고 소처럼 일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마흔도 안 돼서 죽었을 때 식구들이 모두 성당에 나와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의 선물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모두 똑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똑똑한 것만큼 주위 사람들을 고달프게 하며 또한 자기만을 살리려는 사람일수록 상대적으로 남을 죽이게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바보가 되면 모든 사람들을 편하게 해줍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은 남을 살리게 되며 이것이 또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가 신앙 안에서는 높은 영광이 됩니다. 오늘 독서(예레 31, 31~34 참조)에서는 새 계약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옛 계약은 이제 무너졌습니다. 돌판에 새겨졌던 그 계약은 이제 무효가 되었습니다. 법은 아주 좋았지만 백성들이 법을 무시하고 파계했기 때문에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 벌로 나라는 망하여 백성들은 참혹한 신세를 만나게 됩니다. 예레미아는 이때 새 계약을 전해주며 마음에 새겨질 그 아름답고 위대한 계약을 약속해 줍니다. 그런데 그 새 계약은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약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이웃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바로 그런 의미로서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나 자신의 이기심보다는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의 삶을 투신하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바로 삶의 길이요 영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진정 자기의 부활로 만들어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내 자신을 죽이는 삶을 실천하도록 합시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조금만 죽고 또한 가정을 위해서 한 번씩만 더 죽도록 합시다. 그러면 부활의 새벽이 잊을 수 없는 빛나는 아침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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