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바오로ㆍ57세) 단장. 북미주 캐나다에 거주하면서 10여 년간 북미주 전역의 교포 신자들에게 레지오마리애 정신을 심는 일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레지오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여년. 물론 이보다 연륜이 깊은 레지오 단원이 국내에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는 84년 캐나다 이민 후 지금까지 레지오마리애를 위한 일에 자신을 봉헌해왔다. 그 결과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레지오마리애 최정예군이라 할 수 있는「인꼴라마리애」(마리아의 나그네, 마리아의 순례자) 단원으로 임명되어 지난 92년 미국에서「인꼴라마리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의「인꼴라마리애」활동 체험기를 중심으로 레지오 마리애 봉헌한 그의 삶과 신앙을 알아본다. (편집자 주)
나에게는 이력서가 없다. 다시 말해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이력서란 말만 나오면 움츠려든다.
일찍이 고향의 김천고등학교를 다니다 졸업식 3개월 전, 도일하여 동경의 명문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금의환향해 보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집을 떠났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가 되지 않은 1957년 당시로선 일본을 갈 수 있는 방법은 밀항뿐이었다. 1년여 간을 노력해 봤으나 선비만 사기당하고 말았다. 부산항을 넘나들며 허기진 배를 안고 오륙도를 무심히 바라보며 시름을 달래곤 하였다.
삼천포 하동 마산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기회를 포착하려고 안간힘을 써봤으나, 결국 세월만 허송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 친구나 동기생들은 모두 서울로 부산으로 진학해 갔으나 나는 대학 진학의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좌절하고만 있을 수 없고 뒤늦은 국내에서의 진학은 마음에 내키질 않아 도일의 꿈을 재실현코자「동신양조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곳은 나를 오늘의 나로 결정 짓게 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오늘날 이력서. 경력서 하면 나를 움츠려 들게 하고 기를 펴지 못하게 하고, 그리하여 악담하고 실의에 빠지게도 하는, 한편으론 인생 의 갈림길이었던 그 직장생활을 나는 희망을 갖고 일하면서 돈을 모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10남매를 낳아 둘은 일찍 죽고 평탄치 못한 집안 사정과 넉넉지 못한 형편으로 8남매를 기르시느라 일생을 눈물과 한숨으로 점철해 오신 어머니의 가난한 모습, 끼니 걱정으로 늘 우울해하시던 어머니의 손에 쥐어드리는「돈」이라는 물건은 사랑하는 어머니 얼굴의 주름살도 펴게 할 수 있었다. 이것은 나에게 크나큰 보람이었으며 간간이 들려오는 소문은 어머니가 동네마다 다니시며 착한 아들 자랑으로 늘 기쁨에 충만하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신명을 얻은 나는 대학 공부를 꼭 해야 하는가,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이기에 이렇게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고생되게 하면서까지 일본으로 떠나야 할 것인가 하는 회의에 빠지게 되었다.
나의 희생의 대가로 집안 살림은 점차 넉넉해져 갔다. 그간 배불리 먹지 못했던 형제들이 행복해하고, 언제 우리가 그토록 어려웠던가 할 만큼 눈에 띄게 삶의 모습들이 달라지는 데서 드디어 나의 생각은 바뀌어 대학 진학 일본 동경 유학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나마도 몇 년 안 되어 군 소집 영장을 받고 1959년 7월 1일 논산훈련소 입대와 더불어 영원히 대학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토록 어려웠던 군 시절의 삶과 회한을 뒤로 하고 1962년 3월 30일 제대하면서부터 또 한 줌의 쌀과 한 단의 파와 한 장의 연탄, 한 그릇의 된장, 한 포의 멸치를 위해 뛰어야 하는 삶이 시작되었다. 안정을 바라시는 어머니의 희망과 동생의 학업 계속, 누이의 폐병, 가정을 돌보지 않는 형의 계속된 생활은 만학의 꿈을 안고 독어 영어를 배우기 위해 새벽에 다니던 학원조차도 포기하게 만들었다.
진정한 삶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이가 누구 하나 없었던 나는 오로지 혼자서 생각하고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하느님께 매달려 간구하며 희망 없는 나날을 살아왔다.
그 시절 어느 추운 겨울 밤, 술에 취해 쓰러져 동사할 뻔 한 적이 있었다.
그때를 생각해 보면 한없는 감사의 순물을 흘릴 수밖에 없고 지금도 매 순간 기쁘고 보람된 일이 있을 때마다 눈물을 자주 흘리는 눈물쟁이가 된 것 같다.
서울 여의도본당 초창기 시절 10여 년간 본당 발전을 위해 함께 일한 많은 형제자매들 중 대학을 안 나온 사람이 없었다. 오직 나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가운데서 중심 역할을 하였고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인정해 주는 부분이다. 또한 교구 차원에서도 나에게 주어진 모든 임무 수행도 차질이 없었다. 따라서 모든 이들의 아쉬움 속에 1984년 정들었던 여의도 본당을 떠나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아내의 희망은 나의 어머니처럼 늘 소박하고 단순하다. 남편은 항상 곁에 있고 자식들 건강히 잘 자라며 성실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남편과 자식들을 바라보며 크게 궁핍하지 않은 생활 속에서 착실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내의 희망 전부일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 그 소박하고 단순한 희망도 채워주지 못하는 무능한 남편이 되어 버렸는가. 그래서 세속에로의, 돈의 전쟁터에 다시 복귀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또 다시 갈등하곤 한다.
나는 이미 이력서, 다시 말해 경력을 첨삭할 수 없는 50대 후반의 삶을 살고 있다. 나 자신이 흰 종이 위의 까만 점으로만 보일지라도 오직 주님과 성모님께만 의지하고 그분들만이라도 알아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릴 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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