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삶을 열고 닫는 의미가 참으로 범연치 않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물음에 이렇게 살면 된다고 하는 응답들이 다양하게 제시되기도 하는 실정이다. 좋은 상품, 좋은 지혜로 선전되는 광고술만 해도 우리의 기억력에 과중한 압박을 주고 있고 가치의 기준이 모호한 마치 사이비 가치의 팽배가 포화 지경이다.
그 사이 사람의 삶이 고양되거나 확신 있게 된 바가 없고 오히려 미혹과 불신, 병폐와 단절 등 만연하여 존재의 추위는 이제 그 한량을 채웠다고 말할 만합니다.
다시금 사순절에 이르른 이즈음 키쉴롭스키 감독의 10부작 영화인「십계」를 골똘히 생각한다. 각 60분의 비디오 테잎으로 만들어진 이 폴란드 영화는 그 화조가 고통스럽도록 심각하고 침울하며 우선 긴장의 강요를 이겨내기 힘들다. 검푸르게 파장을 그으며 흐르는 밤의 운하처럼 우리 정신 안에 암울하게 굽이치는 물결의 중압감, 그리고 표현 못할 감동의 기묘한 이끌림을 나의 내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달아보고 싶다. 지난해 한동안 여러 계층에 관람되었고 진지한 토론을 유발했던 이 영화는 정녕 구도의 불씨를 품고 사는 모든 사람에게 길이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는 특별한 개성에 의해 제작된 새로운 십계명, 다른 말로 현대인이 십계명이라 할 청신한 모델이다.
현대란 산만한 시대이다. 사람들의 욕구와 갈망도 미묘 복잡하며 물질만능, 가슴이 가담하지 않은 실리와 실용주의가 성행하여 인간의 본질적 살결을 가려버리고 말았다. 사람의 심정과 심리현상, 그리고 잠재의식 등 속은 여지없이 짓눌려 속에서 상처를 배양하고 밖으로는 서로를 소외시키는 배타와 이기주의로 뭉쳐져 한 번씩 거칠게 폭발하면서 피차의 비참을 돋우는 게 현실이다.
이때 이러한 비극들을 냉엄하게 해부하는 한 사람의 진단서 묶음을 우리는 읽을 수 있다.「십계」라는 연작 영화는 거대한 장점을 지니고 있는 바, 생명의 아픈 곳을 울음 우는 성실한 비통이라는 점이 그 첫째이다. 아니 신에 대하여 그리고 인간에 대하여 깊은 동정심과 사랑을 고백하고 있으며, 신의 고독 그리고 인간의 고독을 결코 잊지 않고 작품을 만들었다고 믿어지는 설명 못할 신뢰감부터 헤아려야 한다. 하긴 위의 두 가지는 동의어일 것도 같다.
어떻게 말하건간에 이 영화는 인간에게 있어 인간적이기 위해 치료를 받아야 할 환부들을 헤쳐내면서 그 처방을 함께 논의해 보자고 제한하는 그런 취지가 분명하며 그 자신으로서는 이미 성서적 진리, 즉 신에게서 오는 구원과 가호라고 하는 소견서를 내놓고 있다. 말하자면 다른 이의 결론 역시도 거기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믿고 기다리면서 강요없이 과정의 자유를 보장한다.「십계」는 교사의 위상이 아닌 친구의 입장에서 조용히 생각해 보기를 권면하는 영화이다.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모습을 과장과 미화없이 영상으로 보여주면서 그 안에 꿈틀대는 인간 고통을 뜨거운 가슴으로 포옹한다. 최소한 이렇게 믿게 만든다. 그러면서 회복되어야 할 사람의 참모습, 아름다운 모습을 지향하게 하는 걸 잊지 않음은 물론이다. 통틀어 사람의 본성에서 터져나오는 존재의 발성들을 등한히 하지 않으며 서서히 이를 신에게, 말하면 가장 원리적인 질서에로 돌려 놓으려는 의지를 늦추지 않는다.
하긴 우리 각자도 저마다 십계명 소견서를 서툴게나마 작성할 수 있다. 이때, 문리가 트이질 않아 암중모색일 것이고 누구가의 모범답안이 있다 하면 기웃거려 보고 싶다. 키쉴롭스키의「십계」는 분명, 그 뛰어난 모델이다. 그의 의도는 투철하고 그의 상징은 강렬하며 심히 미학적이다. 그가 인간성의 암울한 지류에서 이야기하자고 제안한 데 대하여 그리고 상식에 안주하지 않고 처음 듣는 언어로써 표현하자는 선명한 독자성에 대하여 감탄과 찬동을 아낄 수 없다.
한편 그의 작품은 난해하다. 그가 설치해둔 난해의 덫에 누구라도 한두 번은 걸려 넘어지게 된다. 하지만 문법이 통하지 않는 무리한 난해가 아니고 얼마간 노력하면 따뜻하게 때로는 눈물겹게 난해성을 풀고 그의 심정 깊이 초대받을 수 있다. 처음부터 명확한 정답을 지니면서 잠시 가리우고 있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는 측량키 어려운 심연이 있다. 그 넉넉한 수량으로 생각하고 표현함이 그의 예술이다. 여기서 더 중요한 점은 일관하여 신께 바치는 경배와 인간에의 연민, 그리고 사랑이라는 지적은 앞에서도 언급했다. 그의 심연은 유익하고 가치있는 품질이 넉넉한 수량임을 다시 한 번 부연했다고 하겠다.
그의 신심은 때로 새 궤도를 연다. 예컨대 축제의 동참과 친구의 어려움을 돕는 일에서 후자를 택했으며(3) 태아의 안전을 위해 의사가 거짓 증언을 하기도 하고 (2) 또는 자신의 몸의 귀중한 심장을 재산 가치로서의 우표 한 장과 바꾸는 어리석음(10)에 대하여도 질책이 아닌 해학으로 미소를 옷 입히는 등 그의 신심 판단은 전통적인 순종 일변도가 아닌 새로운 깨달음의 공시이다. 끝의 이야기의 주인공인 형제는 마지막에 수집한 우표를 도난 당하고 오로지 빈 손뿐인 무소유에 이르게 되며 그러나 형은 아우를, 아우는 형을 되찾게 된다는 복된 긍정주의에 우리는 압도 당한다. 그는 절망의 살결 속에 한 톨 새로운 소망의 씨를 심어두는 일을 잊지 않는다.
첨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건 이 연작 영화엔「낯선 이」라는 인물이 각 편마다 모습을 보이는데 이 사람은 늘 있으되 드러나지 않는 존재이며 그러나 결정적일 때 비극을 예감케 하거나 우려를 표명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를테면 투명한 게시판과 같고 어떤 의미에선 모든 상황에 늘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모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장 진실한 동참자이며 특히는 슬픔의 동참자인 그의 눈과 가슴이 우리 주변에 예외없이 함께 한다고 믿는 일은 우리에게 크나큰 위로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이 작품을 한국어판으로 제작 보급하신 임세바스챤 신부는 한국에 생애를 바치시는 독일인 사제이다. 깊은 감동과 감사를 드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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