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죄를 지어 교도소에 있다 해서 부모가 그 자식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아들을 더 생각하고 걱정하여 사랑하게 됩니다. 만일에 잘못했다 해서 그 아들을 버린다면 그는 부모가 아닙니다. 부모의 사랑이 그렇다면 하느님의 사랑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 독서(2역대 36, 14~23)에 보면 이스라엘이 죄를 지어 벌로써 바빌론에 귀양 갔다가 하느님의 자비로 풀려나는 내용이 나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위 아래가 모두 썩어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이 나와서 회개를 촉구했지만 오히려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을 박해하여 못된 짓만 일삼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느님의 책벌을 받아 나라가 망했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가 혹독한 고생을 합니다. 피눈물 나는 쓰라린 체험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마음이 여리신 분이십니다. 여리다면 죄송한 표현이지만, 벌을 주시면서도 못내 안쓰러워서 고통받아 울부짖는 당신의 백성들을 그냥 두실 수가 없었습니다. 페르샤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서 백성들이 고국을 찾아 돌아오게 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벌을 허락하시면서도 죄인에 대한 사랑만은 중단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 큰 애정으로 당신의 백성을 바라보셨고 그리고 구원의 새 길을 훌륭하게 준비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 중에서도 사실 기뻐하게 됩니다. 대단히 모순된 말 같지만, 우리의 처지가 아무리 비참하다 해도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조금도 떠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옛날「구리뱀」사건을 상기시키면서 예수님, 당신께서 바로 그와 같은 희생 제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과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극진한 애정의 발로였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구리뱀 사건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함께 시나이 반도에서 떠돌이 생활을 할 때에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서 하느님을 원망하여 불평들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만 믿으면 고생 뒤에 낙이 올 텐데도 바로 눈앞의 현실적인 고달픔만 가지고 하느님을 의심하여 대들었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불뱀을 보내어 백성들을 벌 주셨는데 나중에 백성들이 뉘우치자 모세로 하여금 구리뱀을 만들게 하여 그 구리뱀을 보는 사람은 불뱀에 물려도 죽지않고 치유되는 이야기였습니다. 하느님은 이처럼 벌을 주시면서도 그 옆에는 항상 자비의 은총도 함께 마련해 두십니다.
죄가 많은 곳에는 실로 은총도 풍성하게 내려집니다 (로마 5, 21 참조). 죄가 세상에 군림하여 죽음을 가져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의 죽음이 새로운 삶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이열치열」이란 말이 있습니다. 열은 열로써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고통으로 치유되었으며 인간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 하느님 사랑의 최고 표현입니다. 복음에서도 나왔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요한 3, 16).
성서에 이 귀절만큼 우리의 가슴에 큰 감동을 주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아버지가 없습니다. 어떤 부모도 남의 자식을 살리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희생시키지는 않습니다. 죽을 줄 뻔히 알고 있는데 하나 있는 아들을 적지에 보내어 죽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울부짖는 당신의 아들을 못 본체 하시고(마태 27, 46 참조) 죽음의 길을 걷도록 안배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당신의 아들을 팔아서 우리를 사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은혜로운 사순 시기에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면 그는 참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왜 기도해야 되고 왜 선행을 해야 하며 왜 사랑하고 왜 용서해야 하는지를 모른다면 그는 실로 불쌍한 인간입니다. 어떤 형제가 죄를 혼자 몽땅 짓고서는 도리어 하느님을 원망하면서 하느님의 선이시라면 왜 자기를 그렇게 버려 두시느냐고 절규했습니다. 신앙은 내버린 지 오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교통사고에서 생명을 건진 후로는 하느님 사랑을 진실되게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특히 기쁨을 묵상하는 주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지만 불원간에 그분의 부활에 동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와 실수에는 아픈 매도 있지만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큰 하느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비참한 처지를 다시 한 번 성찰해 보고 하느님의 자비에 늘 푸른 기대를 걸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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