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간오지, 금세 마을을 덮쳐버릴 것처럼 높이 쌓여있는 시커먼 탄 더미들, 누런 물, 닭장 같은 사택.
한때 미국 서부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개척지의 어느 신흥도시처럼 호황을 누리던 태백탄전 지역. 이곳의 밤은 여느 도시들보다 훨씬 빨리 찾아온다. 불빛도 없어 더욱 깜깜한 거리에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몇몇 여학생들의 재잘거림만이 밤공기를 가른다.
곳곳에 즐비한 폐가와 빈 점포들을 뒤로 하고 낮엔 그래도 남루한 모습이긴 하지만 동네서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간간이 눈에 띤다. 그러나 이들 중 4명에 한 명 꼴은 부모가 없거나 있더라도 돌봐줄 능력이 없는 결손가정 아이들이다.
올해 국민학교 5학년인 성기(11·정선군 고한읍)는 부모님 얘기만 나오면 부럽기도 하고 설움이 북받쳐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하곤 한다. 성기 네는 할머니와 두 동생 상기 (10) 승기(7) 등 모두 네 식구. 어머니는 5년 전에 가출해 소식을 알 길이 없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열심히 막장 일을 하던 아버지마저 지난 92년 오토바이 사고로 숨져 졸지에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버렸다.
"동에서 매달 주는 쌀(30kg)과 8만 원 정도의 생활 보조비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지만 아이들이 별 탈 없이 곱게 자라주는 것 같아 고맙다"는 할머니 성송춘(65)씨는 막내가 올해 국민학교에 입학인데 중학교까지라도 공부시킬 수 있을지 제일 걱정이라며 고개를 떨구었다.
"올 구정 때 작은 아버지 결혼식 비디오를 보다 엄마 모습이 나오니까 외면해 버리더군요. 그리곤 큰 애가 애써 화제를 딴 데로 돌리려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현보(여·11)네 집은 고한 읍내에서도 가파른 산 중턱을 타고 올라가야만 나온다. 인근에서도 더욱 가난한 사람들만 모여 있는 소위「양지마을」에 현보네는 다른 두 가구와 함께 살고 있다.
현보네도 아버지가 안 계신다. 작년 여름 막장 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발을 헛디뎌 다리에서 실족사했다. 그날도 아버지는 아마 동료들과 어울려 오갈 데 없게 된 탄광촌 사람들의 신세를 한탄하며 거나하게 한 잔 했을 것이다.
화상으로 몸이 성치 않은데다 간질 증세를 갖고 있는 어머니와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가 있지만 돈벌이를 할 수 없어 현보네도 생활보호 대상자로 보호를 받고 있다. 할머니 이금분(72)씨는 "이달엔 1·2월분을 합친 데다 구정까지 끼어서인지 23만 원을 주더라"며 좋아했다.
성기와 현보는 그래도 우선 보호해 줄 가족이라도 있어 나은 편이다. 일찌감치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소외지역으로 인식돼온 탄광촌의 가정은 이미 실종된 지 오래다.
한때「지나가는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호황을 누리던 탄광촌이 89년 정부의「석탄산업 합리화」 조치 이후 사양길에 접어든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 88년 태백 정선을 비롯한 태백탄전 지역에 있던 1백68개 탄광 가운데 모두 문을 닫고 93년 29개만 남았다. 89%인 139개가 무더기로 폐광된 것이다. 실직된 광원만 1만6천여 명에 달한다.
13만이 넘던 정선군의 인구는 절반 수준인 7만8천 명으로, 12만을 웃돌던 태백시 인구가 7만여 명으로 합리화 조치 이후 10만여 명 이상이 줄어들었다. 탄광촌 곳곳이 폐허화 공동화되면서 지역 경제가 뿌리째 흔들리게 된 것이다.
탄광지역이 이처럼 파괴된 데는 이러한 정책적인 이유 말고도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우선 탄광촌 자체가 한때의 시류를 타고 급조된 사회라는 사실이다. "소위 막장을 찾아드는 사람들은 농촌 출신이나 사업 실패자가 대부분이었지요. 이들에겐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기보다는 하루 빨리 목돈을 만들어서 이곳을 떠나는 게 가장 큰 목표였습니다"
장성본당 홍랑표 신부는 그러다 보니 자연 정주심은 찾아볼 수 없고 석탄산업 합리화 조치 이후 사람들이 쉽게 삶을 포기하는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고 말했다.
탄광촌 주민들의 이러한 의식은 성희직 의원 부설 지역발전연구소가 사북 고한 지역 주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총 4백77개 가구 가운데「평생 이 지역에 살겠다」고 응답한 사람은 2%인 11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지역 전망에 대한 주민들의 불안감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또「가족 중에 외지에 나가 생활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1/3정도가 그렇다고 답했고, 그 이유로는 58%가 자녀 교육 문제 때문이라고 밝혀 주민들의 교육열에 미치지 못하는 열악한 교육 환경이 정주의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주하려는 이유로는 교육문제가 전체의 36%, 지역 발전을 기대할 수 없어서가 23%로 나타났다.
앞서 지적된 열악한 교육 환경 문제와 함께 여가를 활용할 수 있는 적절한 놀이문화와 문화 공간이 전무한 것도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한 요인이 되고 있다.
막장 일은 보통 3교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정상적인 리듬의 가정 생활은 파괴될 수밖에 없고, 자연 부부 생활도 원만하지가 못하다. 이런 와중에 가정의 주부들은 자칫 탈선의 유혹을 받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캬바레와 비디오방, 술집 등 향락소비성 산업이 크게 번창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러한 여러 요인들이 결국엔 가정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종래엔 주부의 가출로 인한 가정 파탄이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사북본당 이병론 신부는 "탄광촌 사회가 쉽게 붕괴될 수밖에 없는 것은 주민들을 묶어줄 도덕적 사회적 끈, 즉「정주의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물질주의와 성적 타락을 조장하는 매스컴의 해악도 상대적 열등감과 소외감을 부추기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탄광지역의 가정 파탄은 어머니의 가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출 동기는 대략 3가지. 첫째가 남편이 사고로 죽거나 불구가 됐을 때고, 두 번째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함께 가출하는 경우다. 아이들을 노부모에게 맡기고 도회지로 나갔다가 영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중풍 증세로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와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 일용(11)이네와 당뇨로 고생하는 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 있는 남삼(13)이네, 그리고 아버지는 88년 광산 사고로 사망한 뒤 두 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 정희(16·여)네 등도 모두 어머니가 가출해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경우다.
결손가정 아이들 보호시설인「대건의 집」 (태백시 황지) 책임자 박보나 수녀는 "이곳 아이들은 거의가 부모가 없거나 아버지가 있어도 아이를 기를 형편이 안 되는 경우"라면서 "고아와는 달리 결손가정 아이들은 부모가 있다는 애매한 처지 때문에 더욱 관심 밖에 밀려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태백탄전 지역엔「대건의 집」과 사북의「대철 베드로의 집」등 두 군데서 30여명의 결손가정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만으로는 지역에 산재해 있는 결손가정 아이들을 제대로 거두어들이기엔 역부족이다.
"어릴 적부터 상처 입은 마음은 좀처럼 회복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아이들은 주위가 산만하다든가 정서 불안, 도벽 등 공통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데 고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정말 가정만큼은 파괴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박 수녀는 사회적 환경이 원인을 찾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전에 우선 이들을 보듬어 상처난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 교회가 할 일이 아니겠느냐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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