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인물의 사상의 형성은 순간적으로 완결되지는 않는다. 때로는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 이루어진다고는 하지만, 대개는 그러한 전환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토양이 이미 준비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16세기에 교회 내에 일대 혼란을 가져왔던 루터의 사상도 이미 본란를 통하여 여러 차례 보아왔듯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교회 내의 여러 상황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개혁운동을 이끌어 주었던 그의 신학사상을 정리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서술한 회고록이니 그의 측근들이 정리한 전기의 내용들이 상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신학사상의 단계별 형성 과정을 살펴보고 그 중심 사상의 윤곽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내적 체험을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첫 단계는 그의 수련기와 사제생활 초기로 1505년부터 1508~9년에 해당되는데, 이 시기에는 영성생활에 열심하며 평온하게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단계는 비텐베르그에 갔을 때인 1508~9년부터 1521년까지인데. 이 시기에 영혼의 평정이 무너져버렸다. 슈타우피츠 관구장 신부의 영성지도나 로마 순례(1510~1511년) 때의 총고해성사도 그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하고 맹랑한 정욕으로 영적으로 비참한 슬픔에 잠겼다. 그의 수덕적인 실천이나 잦은 고해성사도 그러한 혼란을 진정시키지 못하였다.
이러한 내적인 갈등이 매일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1521년 전후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된 것으로 본다.
셋째 단계는 1521년 이후로 보는데, 죄로 기울어지게 하는 욕정(Concupiscentia)이 더욱 심해져, 이기심, 동료들에 대한 미움과 시기, 질투, 난폭성, 허탈감, 성적 충동 등으로 자신에 대한 깊은 실망감으로 어쩌면 자신은 하느님의 구원에서 제외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으로 두려워하였다. 후일 그는 이러한 내적 갈등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내가 수도자로 있을 때에「육욕」, 즉 악의 충동, 정욕, 동료 수사들에 대한 증오와 시기, 또는 노여움의 감정 등을 체험하였을 때마다「나는 이제 나의 구원이 틀렸다」고 생각하곤 하였다.
육욕은 항상 나에게 닥쳐오고 있었다. 나는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하였다". 그의 철저한 수덕생활과 성사생활에도 불구하고 욕정으로 인한 혼란상태가 계속되자, 자신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으며 성사의 효험도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체험이 후일 그가 공로와 성사의 무가치성을 주장하게 된 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위와 같은 그의 심리적 갈등과 내적 체험이 그의 신학적 사상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역시 삼 단계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단계는 비텐베르그에서「신학 명제론」을 강의하던 때로, 이 때는 아직도 신학에 있어서 철학의 유용성을 인정하지만 유명론적인 경향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즉 하느님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하느님의 말씀, 즉 성서만이 유효하다는 입장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은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에서 이탈했다고 볼 수는 없다.
둘째 단계는 시평강해를 하던 때(1513~1515년)로 개인적인 신학사상을 더 뚜렷이 드러낸 시기이다. 원죄에 대한 그의 사상은 아직 교회의 정통신학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즉 욕정은 세례성사로 지워지는 원죄의 흔적이며 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조건의 자아의식은 하느님에게 철저히 자신을 의탁하게 하는 신뢰감과 겸손으로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리라는 입장을 견지하지만 하느님의 수동적인 정의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그에 의하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가지는 자라고 하였다. 교회론에서도 아직은 정통적인 신학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안했지만 유명론적인 입장을 받아들이는 등 어정쩡한 입장에서 교계제도의 필요성에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셋째 단계는 로마서를 강해하기 시작한 1515~1516년 시기로 그의 개혁적인 신학사상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바울로 서간에서 인간의 지혜와 성성을 파기하고 하느님의 수동적인 정의로써만이 인간이 구원될 수 있다는 원칙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로마서 1장 17절을 읽고 묵상하면서 그의 신학사상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는 이른바「탑실체험」의 시기는 1512년부터 1519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셋째 단계를 지나면서 그의「다만 성서」,「다만 신앙」,「다만 은총」이라는 그의 독특한 신학사상이 형성되는데, 다음호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