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선 인간을 위해 당신 자신을 온전하게 봉헌하셨습니다. 육화(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심) 자체가 당신의 전 존재를 내놓으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으로써 어린 양처럼 우리를 위해 당신을 희생하셨습니다. 그렇게 안 하셔도 될 분이 종이나 머슴처럼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었으며 이것이 또 그분의 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선 우리도 당신을 위해 우리 자신을 바쳐주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이 우리를 선택하셨듯이 우리도 당신만을 선택하기를 원하시며 그분이 우리에게 다 내주셨듯이 우리도 그분께 다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정한 축복의 길이요 또한 그분과 온정한 일치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서의 주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1독서(창세 22、1~18 참조) 에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의 말씀대로 그분께 바치는 위대한 신앙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여기서 번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이사악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각을 떠서 제단 위에 태워서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명령은 너무도 잔인하고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눈에서 피눈물 나는 참혹한 일이었지만 그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하느님의 말씀대로 번제물로 드리려고 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처럼 불어나게 되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또 하느님의 계산이었습니다. 인간의 계산으론 하나에서 하나를 빼면 제로입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산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에서 하나를 빼면 십만도 되고 백만도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을 인간의 계산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계산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복음에서는 수난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엘리야와 모세를 만나시고 그리고 성부께로부터 영광의 은혜를 미리 체험하시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루카복음(9,28~36 참조)에 보면 그때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장차 당신의 죽음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셨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수난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주님에게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산에서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확인하고 다짐을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미리 입을 수 있었던 것은 수난과 십자가의 길을 피하지 않으시고 용기 있게 젊어지겠다는 그 결심과 각오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실제로 행동에 옮기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라면 당신 자신을 아낌없이 봉헌하는 그 믿음은 그자체가 축복이고 천당이며 영광이고 승리입니다. 영광은 실로 그 희생이 따른 봉헌에 있습니다.
어떤 집에 장가든 아들이 넷이나 있는데 홀로 계신 어머님을 모시는 일로 해서 의견이 분분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서로 모실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딸 둘이 남았는데 큰딸도 자기는 출가외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때 시집 안 간 막내딸이 그랬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시집을 못 가더라도 어머님을 모시고 살겠어요” 결국 막내딸이 어머니를 모셨으며 혼처가 나왔을 때도 어머니를 모시는 조건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아들이 넷이나 있지만 딸자식 하나만 못하다”고. 그 말은 맞았습니다. 그리고 막내딸은 아주 복 받았습니다. 효심에 감복한 남편이 아내를 위해 작은 가게를 하나 차려 줬는데 그것이 나중엔 큰 슈퍼마켓이 되어 남편의 사업만큼이나 커져서 가정의 화목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형제들 중에 가장 든든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도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하늘이 효녀를 돌봐준다”고.
사순절의 존재란 부활이라는 대축제를 위해서 준비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여러 가지 시련이나 십자가 등도 바로 우리의 영광이나 축복을 위해서 준비된 것입니다. 만일에 이런 사실을 모른다면 그는 신앙의 길에서 한참이나 멀리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순 시기에 희생과 축복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길을 하느님께 기쁨으로 봉헌해야 합니다.
죽음을 봉헌하면 진정한 삶이 오고 슬픔이나 아픔을 봉헌하면 참된 기쁨이 돌아옵니다. 하나를 봉헌하면 열이나 백으로 되돌아오고 가진 것을 바치면 또 더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인간의 계산으로는 도저히 타산이 안 맞는 얘기지만 그러나 하느님의 계산으로는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따라서 사순 시기의 은혜는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하느님을 위해서 봉헌하고 희생하여 바치느냐에 그 은혜가 달려 있습니다. 거기에 부활로 이어지는 영광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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