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마지막 순간은 비통한 순간이었다. 제자들에게 앞으로 며칠 후에 닥칠 수난의 비극을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주며 이 고난의 순간은 부활의 영광을 받기 위하여 불가피한 과정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을 때에 제자들은 영광의 때가 온다는 말씀에만 정신을 팔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다(루가 18, 34).
며칠 전에 베드로가 예수께 물은 일이었었다. “저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 저희는 무엇을 받게 되겠습니까”(대목 252 참조). 또 어느 날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길을 가다가 나라에서 누가 제일 높으냐는 문제로 토론한 일도 있었다(마태 18, 1∼5).
예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지 하늘나라는 높고 낮음을 따지는 곳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높고 낮음을 따지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이요 바로 이것이 세상의 모든 불의가 일어나는 근원이 되는 것이다. 어린이들의 세계는 높고 낮음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저 재미있게 섞여 노는 천진난만한 세계이다. 천국의 사정도 마찬가지로 그곳에서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로 세상살이를 어지럽게 할 필요도 없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일이 있다. 높고 낮음에 관심을 쏟다 보면 서로 시기하고 서로 모함하고 서로 짓밟는 마음의 세계가 조성된다. 오늘의 대목에서도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주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하나는 오른편에 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고 이 말을 옆에서 들은 다른 열 제자들은 화를 냈다. 이들이 그토록 예수님의 측근으로 따라다니며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아직 세속에 잠겨 있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제자들이 이와 같은 종류의 염원을 표시할 때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조건을 달아 후한 보상을 약속하셨다. 그 조건은 첫째 예수 자신이 영광을 받기에 앞서 사람들의 희생양이 된다는 것을 이해할 것과 둘째, 제자들도 그 길을 따라야 할 것 두 가지이다. 이 조건은 스스로를 높이지 말고 낮추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봉사하는 길을 걷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니 가장 위대한 사람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그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다. 높고 낮음에 관한 논쟁을 버리는 제자들을 한데 모아놓고 예수께서는 바로 이 교훈을 말씀하신다. 세상에는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있게 마련이고 제자들도 앞으로 세상에 살면서 지상의 하느님나라를 다스려야 하겠지만 제자들은 세상의 군주들이나 장상들이 하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군주들은 권력을 마음대로 부리고 수하에 있는 사람에 군림하지만 제자들은 지상의 하느님 나라, 즉 교회를 통치하면서 권력을 부리거나 억압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천상천하의 모든 권능을 다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탄생부터 마지막 죽음에 이르기까지 비천한 자로서 세상에 나타나신 모범을 제자들은 따라야 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양떼를 가르치고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그들과 함께 일해야 한다. 베드로 전서의 말씀대로 ‘맡겨진 양떼를 지배하려 들지 말고 오히려 그들 앞에 서서 솔선수범해야 한다’(5, 3). 하느님 나라에서 위대한 사람이 있다면 맡겨진 사람들의 종노릇을 하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고 모든 사람을 구할 권능을 가지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수고 수난하는 종의 신분으로 살으셨다. 이러한 맥락에서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러 왔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왔다.” ‘종들의 종’이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참말로 위대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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