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오는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심으로써 당신의 정체를 조심스럽게 드러내시던 예수님께서 이번엔 죽은 인생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나병 환자를 고쳐 주심으로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그분의 능력과 권위는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모를 정도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점차로 믿게 됩니다.
나병은 실로 무서운 병입니다. 옛날엔 한 번 걸렸다 하면 그 시간부터 완전히 죽은 인생으로 취급 받았습니다. 눈은 흘기게 되고 입은 비뚤어지며 목소리는 쇳소리를 내게 되고 눈썹이 빠지며 손가락 발가락들이 오그라들고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얼굴에 돌기가 생겨서 사람들에게 강한 거부감을 일으키는 징그러운 사람이 됩니다.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것이 나병에 걸린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그는 실로 ‘하느님께로부터 벌 받은 상처’를 평생 지니고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나환자들은 건강한 사람들과 철저하게 분리되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진지 밖에 자리 잡고 따로 살아야 했으며 혹시라도 건강한 사람이 잘못 접근하게 되면 자기는 “부정한 사람이오”하면서 상대방에게 자신의 병을 경고해 주어야 합니다. 만일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맞아 죽어야 합니다. 부모와 가족은 물론 세상의 모든 것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외롭고도 불행한 사람이 바로 나병 환자였습니다.
제가 신부 되고 나서 부임한 첫 본당에는 나환자 정착마을이 있었는데 제법 큰 마을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착마을에 있는 환우들은 100% 음성 나환자들로써 이제 더 이상 환자는 아닌 셈입니다.
다만 일그러진 상처로 건강한 세상에서 맘 놓고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해 부족으로 인해서 그들과의 접촉을 대단히 두렵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환우들이 평생 짊어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한 번은 정착마을에서 식사를 하는데 회장님이 저 때문에 약간 불편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주 찾아주면 반가와 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건강한 사람에게 이름을 주고 또한 부식비를 별도로 지불하여 신부님 식사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공소 사목회의 재정으로서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자리에서 그랬습니다. 앞으로는 이렇게 하지 말고 각 가정을 돌면서 그 가정에서 먹는 대로 식구들과 함께 먹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동네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누추한 집에 어떻게 신부님을 모시며 더구나 환자들이 어떻게 신부님과 함께 식사를 같이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고집을 부렸고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은 동네잔치가 되었으며(1주일에 두 번 방문했음) 1백 호나 되는 정착마을을 4년 동안에 네 바퀴나 돌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신부님은 우리에게도 한 푼 주시진 않았지만 돈보다도 더 좋은 것을 주셨다”라고.
오늘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치유해주신 것은 치유 그 자체를 넘어서「저주 받은 인생」이라고 간주되었던 그들에게 높은 인격의 가치를 부여해주신 것이며 또한 어떤 인생도 예수님 앞에서 치유될 수 있고 새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우리 모두가 본받기를 그분은 은연중에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나환자에게 손을 갖다 댄다는 것은 같이 부정 타는 일인데도 예수님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세상에는 나병보다 더 무서운 병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죄를 모르고 속에는 교만과 위선으로 가득 찬 인생들입니다. 그들은 속은 썩었어도 겉은 멀쩡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병자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평생 치유가 되지 않습니다. 옛날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학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시대에도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도 그런 무리들이 사회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병을 솔직하게 내보이면 고쳐질 텐데 감추고 있기 때문에 평생 불구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나환자는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님께 병을 갖고 나감으로써 치유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 곁으로 달려오기를 항상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잘못에 대해 늘 측은한 마음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용기 있게 나아갑시다. 그분만이 진정 우리를 고쳐주시며 구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저를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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