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성인 103위가 탄생한 지 올해로 10년.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혹독한 고문과 살벌한 형틀에 목을 내밀면서도 한 치 흔들림이 없었던 우리 신앙선조들의 삶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져 한국 교회 영성의 핵을 이루고 있다. 본보는 시성 10주년을 맞으면서 과거 천주신앙을 지키려 홀연히 일어섰고, 의연하게 스러져간 선조들의 삶의 현장을 찾아간다. 한국 천주교 신앙의 요람이자 모태가 된 명례방에서부터 피로써 신앙을 증거한 곳곳의 순교성지에 이르기까지 과연 그때 그곳에선 어떠한 일이 벌어졌고,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는지, 또 그들의 삶이 오늘날 신자들에게 남겨준 것은 무엇이며 이를 보존 연구하려는 교회의 노력은 어디까지 와있는지 되짚어본다.
국내 최대의 번화가 패션 1번지로 불리는 명동. 각종 금융기관 상가들이 빽빽이 밀집해 있는 이곳이 한국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예부터 ‘북단재’ 또는 ‘종현’으로 불리던 명동언덕 위에 우뚝 솟은 명동성당은 한국 천주교 신앙의 모태인 ‘명례방 집회’가 열렸던 곳과 지척이다.
1784년 9월(음력),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은 수표교 근처에 있는 이벽의 집에서 이벽과 정약용 권철신 등에게 세례를 주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나누었다. 이벽의 집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수표동 13번지와 관수동 152번지 사이에 있던 수표교의 위치로 볼 때 지금의 백병원(서울 중구 저동) 부근으로 추정된다.
▲교리 연구 예식 거행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난 이벽 등은 중국어 통역관이던 중인 김범우에게 신앙을 전파, 1784년 늦은 가을 이벽의 집에서 김범우는 이존창 최창형 최인길 지홍 등과 함께 토마란 본명으로 세례를 받게 된다.
초기 신자들의 복음 전파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천주교 예식을 행하고 교리 연구도 할 수 있는 정기적인 모임의 필요성을 느낀 이들은 1784년 겨울부터 정기적인 집회를 갖기 시작했는데, 그곳이 바로 명례방(명동성당 부근)에 있던 김범우의 집이었다.
이 집회는 신분 질서의 구별이 엄격했던 당시 사회에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여기에는 이승훈 정약종 이벽을 비롯한 양반들과 중인 등 수십 명이 참여했다. 이들이 받아들인 천주교 신앙은 그때까지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이질적인 것이었다. 삼라만상이 창조한 하느님에 관한 교리, 피조물인 인간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말은 꿈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최초의 신앙 집회지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태동하던 이곳 역사의 현장에는 지금 종현언덕에 명동대성당이, 장악원동에는 한국외환은행 본점이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영세자들로 이루어진 최초의 신앙 집회지였던 명례동의 김범우의 집과 명동대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발아지요, 복음 전파의 중심지로서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명례방 집회가 몇 달간 계속 되던 1785년 봄, 이를 이상히 여긴 형조의 사령들은 급기야 집회 현장을 덮치는 일이 벌어졌다. 이른바 ‘을사추조 적발사건’. 앞으로 1백여 년간 전개될 가혹한 천주교 박해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양반을 취조할 권한이 없었던 형조 관리들은 양반들은 모두 풀어주고 집주인인 김범우만 옥에 가두었다.
▲1898년 성당 축성
김범우가 투옥되고 초기의 신앙 공동체가 파괴된 이후 명례방 일대는 한국 교회사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다. 을사추조 적발사건 후 전국은 박해의 소용돌이에 휩싸였고, 그 와중에 1만여 명이 순교했다.
1892년 5월 8일, 종현에서는 성당 정초식이 조촐하게 거행되었다. 머릿돌 밑에는 조선에서 활동한 성직자와 은인들, 성당을 짓는 데 자원봉사한 1천여명의 신자 명단이 봉함된 채 놓여 있었다. 이 성당은 우여곡절 끝에 1898년 5월 29일 축성식을 가졌다. 성당 지하에는 순교자 묘소가 특별히 마련되었고 기해박해 때 순교한 앵베르 신부 등 성직자들의 유해가 이장돼 이곳에 안장됐다.
▲국민 저항의 진원지
이처럼 ‘명례방 공동체’가 이루어졌던 종현언덕에, 순교자들의 주검을 기초로 세워진 명동대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맏형으로서 민족의 고난과 기쁨을 늘 함께 해왔다.
단순히 일개 본당의 차원을 넘어 한국 천주교회의 얼굴이며 거룩한 순교 성인들이 잠들어 있는 그윽한 ‘믿음의 터전’, 근·현대 한국사가 소용돌이 친 역사의 현장으로서 명동성당은 오늘날까지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국교회 첫 순교자 김범우(토마) - 1784년 이벽의 집에서 영세 유배지 단장면에서도 전교 “열정”
중인계급 출신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 김범우(토마).
김범우는 조선 영조 재위 27년인 1751년, 한양 남부 11방 중의 하나인 명례방에 있던 경주 김씨 충선공파 61세손 김의서와 부인 남양 홍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범우의 부친인 김의서는 사역원 종 5품 벼슬인 통덕랑 역원판관을 지낸 유명한 역관이었다.
김범우는 1767년, 만 16세가 되던 해 유명한 역관 가문의 딸인 천녕 현씨와 결혼했고 만 22세 되던 해인 영조 49년 1773년에 역과 증광시에 합격했다.
증광시 합격 이듬해에 부친을 여읜 김범우는 형우 관우 적우 이우 순우 등 6형제와 두 여동생, 모친을 부양하는 가장 노릇을 하면서 역관의 임무를 성심껏 수행, 종 6품 벼슬인 한학우어별주부에 올랐다.
이벽과 이승훈과 친분이 깊던 김범우는 권일신, 최창현 등과 함께 수표교 부근 이벽의 집에서 천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연구, 천주신앙을 종교로서 이해하고 그 안에 담겨진 진리를 함께 나누었다.
김범우는 이존창(루도비꼬 곤자가), 최창현(요한), 최인길(마티아), 지홍(사바) 등과 함께 토마라는 세례명으로 1784년 늦가을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이것이 이 땅에서 두 번째로 거행된 세례식이다.
세례를 받은 김범우는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고, 가족들과 역관 출신인 동료들에게 교리를 전해 동생 이우(바르나바)와 현우(마태오·족보의 순우인 듯함)를 영세 입교시켰다.
「성세추요」 「진도자증」 「칠극」 등 여러 천주교 서적들을 신앙의 터전으로 삼은 김범우는 1784년 겨울부터 명례방 자신의 집에서 정기 집회를 열어 천주교 예식을 봉행하고 교리 연구와 교회 발전을 모색했다.
1785년 을사년 명례방 집회가 형조의 사령들에게 발각돼 (을사추조 적발사건) 체포된 김범우는 당시 천주교 반대파의 으뜸이었던 형조판서 김화진에 의해 구금, 작은 가시나무로 만든 곤장으로 때리는 태형과 큰 곤장으로 때리는 장형을 받았다.
고문을 통해 배교를 강요받은 김범우는 ‘난언’ 즉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죄명으로 곤장 1백 대를 맞고는 2천5백 리 유배형을 받고 경상도 남쪽의 밀양부로 유배됐고 밀양에서 동쪽으로 30리 들어간 단장면에 배소를 틀었다.
김범우는 이곳 배소에서도 신앙생활을 조금도 늦추지 않고 전교활동을 시작해 1년 만에 단장 일대에 많은 신자들을 배출했다.
김범우는 그러나 1786년 겨울이 되면서 형조에서 받은 고문으로 얻은 상처가 도지고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신앙 실천에 열중해 급격히 몸이 쇠약해져 1787년 정미년 새해 설날을 지낸 지 얼마 안 되어 37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뒀다.
김범우의 죽음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1년 만에 얻은 첫 순교의 화관으로 한국 교회가 얻게 될 수많은 혈세의 시작을 알리는 효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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