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10월 28일 고등동성당에서 8남매의 맏며느리로 혼배해 고색동 시댁에서 농사를 지으며 시부모님을 모시고 시동생, 시누이 둘과 함께 살았다. 혼배하기 전에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들 간의 우정으로 살면 행복하겠다는 희망을 갖고 혼배했지만, 마음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이 시집살이인 것 같다.
아무리 잘하려고 열심히 일해도 구박으로 이어지는 시집살이가 계속되자 행복을 찾을 수 없는 생활이었다. 그래도 남편이 출근길에 빵이나 우유를 사서 내 머리맡에 두고 출근이 늦을까 뛰어가는 모습을 보면 섭섭함이 없어지곤 했다.
유교 집안이었던 시집에서는 성당에 다니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결혼 후 본당에서 레지오마리애 활동을 시작했지만, 시부모님께서 성당에서 활동하는 것을 싫어해 결국 1년도 못 채우고 퇴단하고 말았다. 이후론 겨우 주일만 지키며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시집살이를 하면서 자존심도 버리고 순명과 복종을 하며 살아오는 동안 주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를 체험했다.
레지오마리애 단원으로 마리아의 깊은 겸손과 순명을 본받아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를 총사령관으로 모시고 봉사하고 싶은 마음에 1977년 4월에 또다시 입단하게 됐다. 쁘레시디움 회합이 끝나면 봉사 활동과 해당 가정을 선택해 환자 목욕, 집안청소, 빨래, 바느질 등의 봉사를 했다. 환자가 선종하면 장례도 돌봐줬다. 힘은 들어도 보람 있는 활동이었다.
그렇게 레지오마리애 정신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며 선교하며 활동하다보니 41년째 레지오마리애 군대를 지킬 수 있었다.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모님의 겸손을 본받아 주님의 복음 안에서 살다보니 가족 한 분 한 분이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결국 시댁식구 모두 세례를 받게 되었고, 며느리들과 개신교 권사였던 친척들도 모두 천주교로 개종하게 됐다. 주변 지인들에게도 선교해 현재까지 입교시킨 분들이 174명이나 됐고, 대녀도 75명이나 된다. 덕분에 교구에서 선교표창도 받게 됐다.
그동안 구구절절의 세월 속에서 잘 참아내도록 도와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남은 여정에서는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 되고 싶다. 성령님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은총의 선물은 참으로 여러 가지인 듯싶다.
<다음 주에 계속됩니다>
이순자 (막달레나·77·수원대리구 율전동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