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최고 목자로부터 하위 성직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영성생활의 이상이자 최후 보루이기도 한 수도생활에 이르기까지 세속화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일반 신자들의 신심생활은 어떤 상태였는가?
주교들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신자들의 영성생활에 소홀히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교회의 신자생활이 전반적으로 악화일로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외적 형태의 신심활동은 매우 활발했다고 볼 수 있다. 1년에 1백 일이나 축일미사를 지내고, 연간 1백60일을 단식과 금육의 날로 지켰다. 뿐만 아니라 성서가 모국어로 번역되어 배부될 뿐만 아니라 일반 신심 서적도 활발히 보급되었다. 루터가 최초로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을 독일 신자들에게 보급한 것으로 혹자는 말하지만, 사실은 벌써 1461년부터 1522년까지 독일에서 이미 약 28개의 독일어 성경이 인쇄되어 보급되었다. 또 그 자신이 희랍어나 구약성서의 고대어를 잘 몰랐기 때문에 단독으로 번역했다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당시 또 애덕을 실천하는 많은 자선단체가 결성되었고 로사리오기도 십자가의 길 삼종기도 성화 보급 매일 주요 기도문(주의 기도 성모송 사도신경 십계명) 바치기 등 새로운 신심행사가 번창하였다. 특히 성모신심, 성인과 성인의 유해공경, 대사와 연관된 성지순례와 미사 참례 등이 활발했다.
그러나 위와 같은 긍정적인 면들이 동시에 부정적인 요소로 변질된 부분도 있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백성들 사이에 퍼져 있는 불확실성, 이로 인한 동요와 불안 조바심과 연관되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예기치 않은 천재지변 기근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 용병들의 불안정성 등이 사회 불안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현상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위의 여러 현상들이 하느님의 징벌로 간주되어 죄로 인한 그리스도 심판의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되어 자비의 하느님보다는 냉혹한 징벌의 하느님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특히 농촌지방에서는 악마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대단하였다. 더구나 점성술가들의 허황된 유언비어와 일부 광신자들의 출동과 함께 묵시론적인 설교가 두려움을 가중시켰다. 그래서 대중들은 심리적인 안정을 얻고 구원에 대한 가시적인 확신을 얻고자 성지순례와 대사 획득에 열광적이었다. 대사는 죽은 이를 위한 확실한 효과를 보증하리라는 기대감과 교회 및 세속 제후 주교 신부들의 수입원이란 실리가 일치하여 더욱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성인유해 공경도 일정 기간의 벌을 면해준다는 한대사와 연관돼 각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반 제후들과 자기네 소득과 연관시켜 열정적으로 추진하였다. 때로는 유해 쟁탈을 위한 싸움도 불사할 정도였다. 위와 같은 각종 신심생활은 다분히 개인주의적인 이기심과 기복적인 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나눔과 섬김과 봉사를 통해 일치된 사랑의 공동체보다 길흉화복과 관계된 개인주의적인 신앙으로 흐르기 쉬웠다. 물론 영혼 구원과 영생에 대한 열망, 죄사함을 통한 영혼의 안식을 얻고자 하는 기본적인 자세 자체를 틀렸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방법에 있어서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미신적인 요소가 가미된 신심 행위에 더 비중을 둔 것은 하느님 중심의 신앙에서 개인의 실리 위주의 기복신앙으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예외 없이 독일 교회 전체에 해당된 현상은 아니나 다방면에 걸쳐 침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진보하지 않는 것은 퇴보하는 것이다”라는 라틴어 격언이 있다. 교회는 항상 쇄신되어야 한다. 쇄신할 필요성을 의식하지 않거나 쇄신하고 있지 않는 정체된 공동체는 퇴보하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쇄신하고 있는가? 쇄신의 필요성을 진지하게, 그리고 겸허하게 인정하고 있는가? 교회의 가시적이고 외적인 성장을 자랑하여 개선주의에 편승하는 교회라면 쇄신하는 교회의 모습이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제일차적인 사명에 충실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말씀을 선포하며 증거하는 교회로 쇄신되어야 할 것이다. 사도들은 “오직 기도하고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사도 7,3) 육신을 지탱하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식량 배급까지도 포기하였다. 우리 한국 교회가 자랑할 것은 숫자적인 교세나 이러저러한 사업에 앞서 하느님 말씀에 소박하게 충실하는 영적인 힘이어야 할 것이다. 시대의 징표를 깨닫고 우리 교회라는 집단이기주의에서 깨어나 실리와 지역과 정파를 초월하여 우리 민족과 국가 공동체에 봉사해야 할 교회의 소명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의 진정한 쇄신을 위해 설령의 역사하심을 겸허히 받아들이도록 은혜를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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