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신학에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요소들은 공의회주의, 수덕신학, 복음주의적인 청빈 생활이었다.
소수이긴 하지만 일부 신학자들과 교회법 학자들 사이에 교회에서 이미 공적으로 거부된 극단적인 공의회주의가 교회가 당면한 긴박한 문제를 해결하는 최후의 유일한 수단으로 검토되곤 하였다.
인간적인 지혜를 필요로 하는 문제 해결을 위하여 다수의 의견을 집약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민주주의적인 다수결의 방법이 고려될 수가 있다. 그러나 다수결에 의한 결정이 모두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절대적인 최상책이 될 수는 없다. 문제의 본질에 따라 해결 방안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주선에 대하여 전혀 상식조차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우주선의 항로에 대하여 다수결에 의한 표결로 무엇을 결정한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강아지의 암수를 다수결의 표결로 결정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교회는 성서와 성전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의 합법적인 권위로 신앙에 관한 계시 진리를 순수하게 보존하고 가르칠 사명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았다. 물론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 상황에 맞게 그 정신을 구현하는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인간적인 지혜가 필요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판단은 교회의 합법적인 권위를 가진 교회의 최고 장상에게 유보되어 있다.
공의회주의와 같은 극단론이 마르띠노 5세(1417~1431), 에우제니오 4세(1431~1447) 비오 2세(l458~1464) 식스도 4세(1471~1484) 율리오 2세(1503~1513) 등 여러 교황들로부터 여러 번 거부되었지만, 교회가 심각한 위기에 처할 때마다 공의회주의적인 발상이 해결 방안으로 제시되곤 하였다. 신학적인 문제, 교회의 분열, 교회의 쇄신에 대한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할 때 교황에게 비교적 충실하다는 신학자들도 문제 해결의 최후 수단으로 공의회 개최를 제안하였다. 이러한 제안은 결국 교회 쇄신이나 당면한 문제 해결에 대한 교황청의 무기력한 대응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공의회가 이해관계가 상반된 당사자들의 정략적인 토론장이 되어 본질에서 벗어나 파격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고 하여 공의회 개최를 피하거나 자주 연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터도 문제 해결을 위해 공의회 소집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루터의 신학에 영향을 준 신학자 중 지나칠 수 없는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요한네스 타울러(Johannes Tauler 1300~1361)이다. 그는 도미니꼬 수도회 회원으로서, 그리고 신앙의 우위성을 적극적으로 강조하고 성사신학을 비판한 신비주의자로서 루터의 선구자로 간주된 엑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의 제자로서, 유명한 설교가이자 영성 지도자였다. 그는 수덕적인 면에서 감성을 정화하기 위하여 모든 면에 있어서 하느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라고 지도하였다. 만일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지옥의 영원한 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말하였다. 감성에 있어서 완전히 정화된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경지의 자세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능동적인 활동을 포기하고 순수하게 수동적인 자세에서 하느님의 역사하심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가르침이 루터의 영성신학에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드러났다.
모든 것을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위대하심 앞에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인간의 소위 ‘영웅적이고 희생적인’ 행위 역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외적 행위는 무가치하니 공로의 의미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에 무한한 신뢰심을 가지고 고난이 있을 때 그리스도께 피신할 뿐이라고 한다.
위와 같은 사상은 인간 원죄의 결과에 대해 성 아우구스띠노의 ‘오! 복된 탓이여’(O! Felix Culpa)라는 긍정적인 면보다는 비관적인 관점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요한네스 타울러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변화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를 위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 필요한 선행을 하며 교회의 권위 있는 가르침에 순명하는 엄격한 수덕생활을 요구하였다. 루터의 수도생활 초기에는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였지만, 후에는 이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았다. 타울러는 신앙을 위한 신비적인 체험을 추구하는 입장이었는데, 루터는 하느님에 대한 합리적이고 유추적인 인식을 과소평가하면서 유명론적인 신앙 절대론으로 기울었다.
14세기 후반부터 보다 복음적이고 실존적인 그리스도인 생활을 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특히 근대적 신심(Devotio Moderna)과 인문주의에서 돋보인 경향이었다. 마술적인 성사주의나 의심쩍은 외적인 신심 형태에 대한 반작용으로 내적이고 성서적이며 윤리적이고 실존적인 신앙생활을 극단적인 자세로 추구하는 경향을 띠었다.
차후에 보게 되겠지만 위와 같은 여러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루터 신학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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