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갑술년은 UN이 제정한 ‘세계 가정의 해’다. 현대 산업사회가 가정을 흩어지게 하고, 피폐화된 가정문제가 결국 사회문제를 낳는 등 심각한 가정의 위기가 우리 사회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 가톨릭신문은 ‘가정의 해’ 연중기획으로 실종된 가정을 되찾는 작업을 시작하고자 한다. 우리 주변에 가까이 있는 피폐화된 가정의 실태를 알아보고, 이들을 위해 우리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가난이란 죄 아닌 죄로 삶의 공간이 파괴당하고 있는 도시 빈민들은 가정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부분이 산업사회의 불균형적 발전으로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든 이들 도시 빈민들은 도시인도, 그렇다고 농민도 아닌 상태에서 대도시 주변에 슬럼가를 형성하고 산다. 일용 노동자로 파출부로 엄마 아빠가 빠져나간 3평짜리 지하 셋방에는 어린 아이들만이 남겨져 하루 종일 갇혀 지내는 일도 허다하다.
실제로 80년대 후반에는 어린 두 아이를 두고 일터로 나가야 하는 가난한 두 부부가 방문을 밖으로 잠그고 나간 사이 불이 나 아이들이 불에 타 죽는 사고가 발생해 세인들의 가슴을 우울하게 한 것을 우리 모두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알코올중독 도박 성행
“3∼4평의 집에서 혼자 자라나는 도시 빈민 아이들에게 가정이 안식처가 되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잘라 말하는 도시 빈민 운동가 김중미씨(아녜스‧인천 기차길옆공부방 실무자)는 “이 지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인간승리일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 이들을 다시금 빈민으로 전락시킨다”고 토로한다.
전문 기술이 없어 정상적 산업구조에 편입되기 어려운 이들이 사회 속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절망감이 알콜중독, 도박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절망감을 느낀 남편들은 자기 부인에게 화풀이(?)를 하고, 결국 가정은 쉽게 부서진다.
더욱 심각한 것은 어머니들의 가출이다. 어머니들의 가출이 아이들에게 전혀 충격을 주지 못할 정도로 이미 오래 불거진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인천시 동구 만석동 빈민지역에 거주하는 동민(12세‧가명)이는 “어제 어머니가 가출했어요”라고 담담하게 말하고 “아버지가 매일 술을 마시고 어머니와 우리들을 때려 어머니가 가출했다”며 “밉지만 가출한 어머니가 이해된다”고 어른스럽게(?) 말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어머니의 가출을 더 이상 충격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아이들의 정서, 이쯤 되면 도시 빈민 가정은 말 그대로 사랑의 사각지대임을 느끼게 한다.
◆“엄마가 가출했어요”
도시 빈민과 함께 살고 있는 대부분의 봉사자들은 “현재의 교회가 더 이상 도시 빈민들에게는 의미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중산층화 된 교회 그래서 도시 빈민들이 찾아갈 수 없도록 높아진 교회 문턱이 이들에게 희망조차 느끼지 못하게 한다.
“희망보다는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교회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고 물어보면 아무도 이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김중미씨는 “교회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적 가치를 알게 하고, 희망을 갖도록 하기 위해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교회는 이에 대해 그래도 적극적인 사목 방향을 정하고, 관심을 표명한 것과는 달리 내 집 울타리 안에 가난으로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도시 빈민들을 위해서는 거의 무관심하다는 게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이에 대해 빈민지역에서 공부방 또는 아가방을 운영하는 실무자들은 “이 지역에서 사는 아이들 중 그래도 공부방을 나오는 아이들 가정은 건강하고, 화목하다”고 밝히고 “가난한 지역에 들어와 있는 이런 센터들이 많이 생길수록 이들의 가정이 밝아질 수 있다”고 희망적인 제안을 했다.
◆삶의 희망 제공 필요
실제로 빈민지역의 공부방은 아이들 교육뿐 아니라 지역 주민을 위한 한글교실, 어머니교실 등을 운영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또 단순한 공부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특성을 살리면서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케 하는 공부방들의 역할이 가난하지만 건강한 가정을 이루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인천의 대표적인 빈민지역인 만석동에 위치한 기차길옆공부방 실무자 김중미씨는 “때론 배신감을 느껴 이 지역을 떠나려 한 적도 많지만 아이들에게 희망을 걸며 살고 있다”고 토로하면서“이 아이들을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잡아주면 그 이후의 삶에 희망을 걸 수 있다는 믿음으로 아이들과 뒹굴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빈민지역에서의 공부방 운영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93년 초부터 인천과 부천의 빈민지역에 늘어난 공부방들이 채 1년도 못 돼 문을 닫고 현재는 총 12개가 남아 있다. 남아 있는 공부방 역시 열악하기는 마찬가지다. 경제적 어려움과 빈민에 대한 인식 부족이 좋은 뜻을 갖고 일을 시작하는 이들을 중도하차하게 한다.
교회는 올해를 ‘가정의 해’로 선포했다. 건강한 가정, 화목한 가정을 위해 온 교회가 일익을 담당할 것이라고 연초 각 교구장들은 사목교서를 통해 밝힌 바 있다. 그렇지만 아직도 가난한 지역, 특히 황폐해져가는 도시 빈민 가정을 돌보자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 듯하다.
빈민지역에서 이들을 위해 일하는 실무자들이 “그래도 공부방에 나오는 아이들의 가정은 건강하다”고 말했다면, 교회가 이들을 위해 무엇을 도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해야 한다. 단순한 물질적 지원도 지원이지만 빈민지역에 속한 본당을 중심으로 지역에 속한 본당을 중심으로 지역 내 공부방과 연대, 결손가정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노력해야 할 때다.
◆소공동체 활성화를
얼마 전 전국 도시 빈민 관련 성직자들이 정기적으로 만나기로 정하고 모임을 시작했지만 아직 기대하기는 미흡한 실정이고, 도시빈민사목위원회가 구성돼 있지 않은 교구가 서울 부산 광주를 제외하고 대부분이어서 한국 교회가 도시 빈민을 위한 사목에 무관심해왔다는 지적을 면할 수 없다.
가정의 해를 맞는 한국 교회가 피폐해져가는 빈민지역의 가정을 감싸 안기 위해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목적 전환이 필요하다. 가난으로 가정이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비복음적 현실을 감안한다면 교회가 이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무궁무진하다.
기존 지역의 공부방에 대한 지원은 물론, 도시 공소를 활성화시켜 신부가 정기적으로 이들을 방문하고 이들과 소공동체 모임을 지속하는 것도 사목의 한 방편이 될 수 있다.
희망이 없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적 삶으로 이들 가정이 성화될 수 있도록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 또 도시 재개발에 의해 자신들의 삶의 자리가 파괴될 위험을 느끼며 살고 있는 이들에게 교회가 먼저 다가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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