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인 중세 말기 학계의 특징은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점이다. 특히 신학에 있어서 이교적인 사상이 확산되기에 적합한 여건이 성숙되어 신학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불확실하고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교의적으로 명약관화하게 정의된 신성불가침적인 내용과 연구 검토의 문제 사이의 한계가 무시되었다.
천수백년 동안 정통적으로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로 존중되어온 성전의 요체까지 포함하여 신학의 모든 내용들을 소위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에 의한 논쟁거리로 삼았다. 물론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학문적 태도 자체를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혓바닥으로 색깔을 구분하고 눈으로 맛을 보려는 것과 같이 학문의 대상에 따라 그 방법론도 달라져야 하는데, 논쟁의 차원과 한계를 이탈한 비합리적인 자세라는 점이다.
위와 같은 분위기에서 신앙에 관한 교황의 교서나 칙서, 교부들의 저서와 공의회의 결의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진 교회의 거룩한 전통에 의한 교회의 교도권을 거부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보헤미아 지방에서 위클리프에 의해 확산된 이단적인 사상의 유일하고 가장 기본적인 규범으로 내세우며, 성서에 명시적으로 준거하지 않는 한 교도권의 무류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유일하게 참된 으뜸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 외에 어떠한 사람의 권위도 인정할 수 없다며 교황의 수위권을 소위 ‘제국적인 제도’의 산물로 비판하면서 교황의 권위는 마땅히 거부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만일 성서에 명확히 규정되어 있지 않다면 교황의 재치권도 그에 대한 순명서약도 무효하고 주장하였다. 만일 어떤 신도가 성서의 말씀으로부터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공의회의 결정에 순명할 의무가 없다고 하였다.
사실 복음이 일차적으로 그 시대 그 지역의 사람들을 위해서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이고 후대의 사람들은 하느님 말씀의 본래의 뜻과 정신에 따라 자기들의 시대와 지역의 상황에 맞추어 알맞게 적용시킬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된 그 시대는 현대에 비교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단순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삶이 단순했던 그 시대의 그 지역 사람들을 위하여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이 2백~3백년 후, 1천4백~1천5백년 후 혹은 인류 역사상 가장 다변화된 현대의 구체적인 사항을 구체적으로 지도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오직 성서만으로’(Sola Scriptura)를 시대와 지역의 특수성을 무시한 채 흑백논리의 기준으로만 독선적으로 고집할 때, 하느님의 말씀을 박물관의 골동품으로 전락시키면서 시공을 초월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거부하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본다.
시간적으로 또 학문적 경향으로 루터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몇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베셀의 요한루크라트(Jo-hann Ruchrat von Wessel 1400/2-1481)는 에르푸르트(Erfurt)에서 공부하였고 그곳에서 가르쳤으며 학장으로 재직하였다. 그는 보름스(Worms)와 마인쯔(Mainz)에서 설교가로 활동하였었는데 그의 사상이 교회의 가르침과 어긋난다고 고발 당한 후에 공적으로 철회하였고, 그가 소득된 아우구스띠노 수도원에서 감금되었었다. 그의 사상이 루터의 스승인 우신겐(Usi-ugen)에 의해 소개되었다. 그의 교회론에 의하면 교회는 구원에 필요한 신앙과 도덕의 진리에서 무류성을 보증하는 성령에 의한 불가시적이고 비제도적인 차원에서 사랑으로 일치된 신도들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교황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대리자도 아니고 그와 공의회는 윤리적인 죄에 대한 벌을 부과할 수도 없으며 하느님만 용서할 수 있기 때문에 사죄권도 행사할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성사적인 사죄는 선언적인 가치만 있을 뿐이며 성서적인 근거가 없는 대사는 선행을 돈거래로 전락시켰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신학적 논쟁의 유일한 근거를 성서에 한정시킴으로써 성서 제일주의를 주장하였다. 교의적이거나 전례적인 분야에 있어서도 성서에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성인들에 대한 경신례나 성체성사의 전질 변화, 병자성사 등도 그리스도께서 직접 언급하신 일이 없는데도 후에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꾸며낸 제도이기 때문에 무가치하다며 후스파의 사상을 대변한 것처럼 보였다.
요한네스 베쎌 간스포르트(Johannes Wessel Gans-fort, 1419?-1488)는 네델란드의 그로닌겐(Groni-ngen)출신의 평신도로서 쾰른에서는 토미즘을 공부했고 파리에서는 둔스 스꼬뚜스의 추종자였다가 후에는 유명론자가 되었다. 그는 교회론에서 하느님의 말을 성도들에게 선포하는 의무를 충실히 하는 한 교계 제도를 받아들이지만 교황과 공의회의 무류지권은 거부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신앙적인 문제에 있어서 교회의 권위에 순명해야 할 의무를 인정하지 안했다. 고위 성직자와 일반 성직자의 가르침을 판단하기 위한 기준은 각자가 주관적으로 이해하는 성서라고 하였다. 역시 성서 제일주의의 경향을 띠었다. 그리고 죄는 참회와 애덕행위로 지워질 수 있으니, 사제의 사죄는 선언적인 의미만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성사적 효과와 대사, 연옥 등을 거부하였다. 신앙과 의화의 개념, 자유로운 인간과 의화를 위한 협력의 능력, 성서와 공존하는 성전을 인정하는 것 등은 루터와 다른 점이다. 따라서 루터가 그의 모든 사상을 전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교회론과 성사론의 많은 부분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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