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째 우간다 선교활동 펼치는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여혜화 수녀 (상)
“아프리카에서 삶, 자나 깨나 예수님 밖에 없었죠”
1993년 진자교구에 진출해 병원·학교 통한 사도직 수행
‘기도하고 일하며’ 사랑 실천 수도자에 대한 주민 신뢰 커져
설립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우간다 분원 모든 활동 동행
6월부터 우간다 분원장 맡아
아프리카 수녀들의 수련 지원을 맡은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원장 서준석 수녀(맨 왼쪽)가 여혜화 수녀(맨 오른쪽)를 비롯해 우간다 분원 수련수녀들에게 수녀원 곳곳을 소개시켜주고 있다. 사진 박원희 기자
“아프리카에 가톨릭신자가 많이 있나요?” 여 베네딕다 수녀가 종종 듣는 질문이다. 적어도 우간다교회를 말할 땐 ‘그렇다’이다. 우간다의 가톨릭신자 비율은 전체 인구의 40%를 넘어섰다. 이어 개신교 신자와 무슬림 수가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교회 신자 비율 11%와 비교해도 월등히 높은 수준이다. 게다가 세계교회통계에 따르면 최근 신자 수가 가장 빠르게 증가하는 곳이 아프리카, 그 중에서도 우간다와 콩고, 나이지리아 등이다. 특히 우간다교회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많은 순교성인을 냈다. 우간다인들은 1879년 처음으로 가톨릭신앙을 접하고 신앙의 싹을 틔워왔지만 1885~1887년 당시 통치자였던 므왕가 2세의 박해에 스러져갔다. 혹독한 박해로 인해 외국인 선교사들도 대부분 탄자니아 등지로 떠났지만 남은 신자들은 죽음으로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에 우간다를 사목방문, 가롤로 르왕가, 요셉 무카사 등 우간다 순교성인 22명의 시성 50주년 기념미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우간다교회 진자교구에 자리 잡은 툿찡 포교 성베네딕도 수녀회. 수도 캄팔라에서 차로 두 시간여 거리에 있는 작은 도시 진자에서 수녀회는 일종의 보건소와 같은 역할을 하는 성 베네딕도 헬스센터(이하 병원)와 성 베네딕도 유치원 및 초등학교 등을 운영 중이다. 이곳 병원과 학교 등에서는 15명(6월 기준)의 수녀들이 의사·간호사·교사 등과 협력해 사도직을 펼치고 있다.
#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선교사
피로감이 확 몰려들더니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말라리아 같은데….”
얼른 약을 한 줌 입에 털어 넣고 숙소로 돌아왔다. 하지만 자리에 누워서도 머릿속으로는 산더미 같이 쌓인 일들이 와르르 밀려들었다. 눈을 감고 느릿느릿 성호를 그었다. 여 수녀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 하느님을 위한 일을 다시 생각하고, 하느님께 내어 맡기고, 그 분의 말씀에 가장 귀 기울여야 하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바쁜 게 우선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선”이라며 “기도하는 게 너무 신난다”는 것이다. 1993년 우간다에 처음 왔을 땐 한동안 한 달에 한 번꼴로 말라리아를 앓을 정도였지만 이젠 면역력도 강해졌고 병을 이겨내는 요령도 터득했다.
아프리카에서의 삶은 자나 깨나 예수님 밖에 없었다. 가족과 동료 수도자들을 뒤로 하고 홀로 떠났다. 친구도 없고 음식도 변변찮았다. 여 수녀는 “그래서 더 좋았다”고 말한다.
여 수녀는 수련기 때부터 선교 사도직에 대한 원의를 품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언제, 어디로 데려가 얼마 동안이나 선교의 도구로 쓰실 지는 예수님의 몫, 예수님께서 알아서 해주실 것이라 생각하니 걱정 한 점 없었다.
그는 18살 나이에 수녀원 문 안으로 들어섰다. 수도회 영성은 물론 입회 직후 선배 수녀님들에게 들은 ‘남에게는 후하게 나에게는 엄하게’라는 말에도 반해 버렸다. 대구와 창원 파티마병원, 소록도 등지에서 활동한 경험이 우간다에서 간호사로 활동하도록 뒷받침해주는 또 하나의 밑거름이 됐다. 6월부터는 우간다 분원장으로도 활동한다. 수차례 거절해왔지만 이번엔 “순명하면 축복하신다는 믿음, 회개하는 마음가짐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여 수녀의 하루일과는 새벽 4시 기도로 시작된다. 수녀원에서 걸어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병원으로 출근하면 글자그대로 정신없는 하루일과가 이어진다. 아무리 바쁜 날이어도 기도시간 만큼은 모든 수녀들이 성당에 모여 침묵의 시간을 갖는다. ‘기도하고 일하며’,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다하는 모습이다.
# 가톨릭신자도 무슬림도 병원에서 만나
진자에 터를 잡고 처음 지은 집은 수녀원이 딸린 작은 진료소였다. 하지만 의사의 월급을 줄 형편이 안 돼 간호 인력만으로 운영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진자 지역 뿐 아니라 인근 지역과 수도 캄팔라에서까지 환자들이 찾아들었다.
“예수님께서 최고의 의사이시니 늘 기도하면서 진료하자”는 마음으로 성실히 임했다.
병원 문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루는 갑자기 무슬림 할아버지 한 분이 아들들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에 왔다. 그는 캄팔라에 있는 종합병원에서 뗀 진단서를 갖고 있었다.
‘아니 왜 큰 병원에서 치료를 하지 않고, 이렇게 작은 병원으로 오셨을까?’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게다가 무슬림이라는 사실에 가톨릭교회와 수도자들에 대한 선입견 혹은 편견이 있을까 싶어 꽤나 신경이 쓰였다. 그의 병세는 심각했다. 심장이 분당 평균 30회 정도만 뛰는 상황이었다. 심장 박동 수를 정상적으로 되돌리기 위해 약물을 써야 했지만 혈압 때문에 너무 위험했다. 진단서에는 수술도 할 수 없는 환자라는 내용이 있었다.
‘예수님 이럴 땐 어떻게 합니까? 무슨 수로 이 환자를 돌보냐 말입니다…’라는 한탄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무슬림이 병원에서 사망하면, 지역 사회 내에서 가톨릭교회에 대한 악감정이 생길까 우려됐다. 여러 사례들을 짚어보고 갖가지 의학서적도 뒤졌다.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병원에서 얻은 오랜 경험을 더듬어가다 수도회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처방전과 약을 떠올렸다. 마침 대구 파티마병원에서 보내준 약이 있었다. 환자에게 “달리 치료 방법이 없다”고 솔직히 말하고 “일단 3일치 약을 드셔보시라”고 권했다. 이후 3일간 여 수녀는 그 무슬림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까봐 그야말로 매 순간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고 한다. 3일 후 그는 다른 이의 부축도 받지 않고 병원에 왔다. 여 수녀는 속으로 ‘예수님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돌아가시지 않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반복하며 다시 검사를 하고 약 처방을 했다.
그런데 며칠 후부터 갑자기 무슬림 환자들이 병원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그 할아버지는 인근 마을 모스크의 장로로, 무슬림들 사이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큰 어른’이었다고 한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수녀들과 그들이 운영하는 병원에 대한 소개는 입소문을 타고 번져갔고 수녀들에 대한 신뢰도 깊어졌다.
(다음호에 계속)
※선교 후원 계좌 : 대구은행 092-12-000551 재단법인대구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여 수녀(가운데)가 간호 수녀, 의사와 함께 환자 치료 방안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로마 총원 직속 우간다 분원 제공
지난 6월 3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맞아 성 베네딕도 초등학교 학생들을 비롯한 미사 참례자들이 병원과 학교 곳곳에서 행렬하며 성체강복 및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로마 총원 직속 우간다 분원 제공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