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교회
교부학에서 아프리카 교회라고 할 때에는 아프리카 대륙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리비아 북부 지역의 교회를 국한하여 지칭하며, 그 중심 도시는 카르타고였다. 이 지역은 기원전 2세기에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로마를 정벌하기 위해 원정에 나설 만큼 일찍부터 도시들이 번창하였고, 로마제국 시대에도 이탈리아와 지리적으로 인접한 관계로 중요한 무역상대가 되었다. 아프리카 교회는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로마교회에 의해 복음이 전해졌으며, 따라서 로마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로마제국 어느 곳에서나 교회가 박해를 받았지만, 이 지역의 복음 전파의 속도는 가히 놀랄만하다. 떼르뚤리아누스는 197년에 쓴 「호교론」 1, 6~7에서, “우리 크리스찬은 괄목할 만큼 많다. 도회지에 국한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시골 벽촌, 산간지역, 섬들에도 많다. 우리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마치 폐허에서 소생하듯 남녀노소, 고위층의 사람들까지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보다 약 50년 후에 카르타고의 주교 치쁘리아누스는 카르타고 주교회의에 모인 주교들의 숫자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252년 회의에 42명, 253년 회의에 66명, 256년 1차 회의에 71명 그리고 2차 회의에 87명의 주교들이 모였다고 증언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아프리카 교회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교세 신장의 이유들 중에 하나는 아프리카 교회 안에서 일찍부터 라틴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인 것 같다. 사실 이 지역의 중심지인 카르타고에는 로마의 관리, 군인, 상인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므로 주로 라틴어를 사용하였다. 현존하는 라틴어교회 문헌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180년에 저술된 「쉴리움의 순교자 행전」인데, 아프리카의 누미디아 지방 출신인 여섯 순교자들이 카르타고에서 심문받고 참수된 기록이다. 그리고 카르타고의 떼르뚤리아누스가 197년경부터 본격적으로 라띤어로 저술하기 시작하였으며, 치쁘리아누스 주교가 그 뒤를 이었다. 이것은 250년경에야 라틴어 저서들이 나오게 된 로마교회에 비해 50년가량 앞선 것이다. 떼르뚤리아누스, 치쁘리아누스, 아르노비우스, 락딴시우스, 아우구스띠누스로 이어지는 아프리카 교회의 신학 주류는 로마교회의 신학을 능가할 만큼 뛰어났으며 라띤교회의 신학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생애
떼르뚤리아누스는 155년경 카르타고에서 아버지가 총독 관저의 백인대장인 이교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법률을 전공한 다음 변호사가 되어 로마에서 크게 활약하기도 하였다. 195년경에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모습에 감동되어 그리스도교에 귀의한 다음, 카르타고에 머물면서 자신의 문학, 철학, 법률 등 모든 지식을 활용하여 신앙옹호에 전념하였다. 그는 끝까지 평신도로 머물러 있었지만, 195년부터 220년까지 신학 전반에 걸쳐 수많은 귀중한 저서들을 저술하였다. 떼르뚤리아누스는 라틴교부들 중에서 아우구스티누스 다음으로 가장 훌륭하고 독창적인 신학자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다방면에 뛰어난 학식을 갖고 있던 그는 불굴의 투지와 인내, 그리고 정열적인 수사학적 표현과 신랄한 풍자로 신앙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진리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모든 대상 즉 이교인, 유다인, 이단자들을 대항하여 어떠한 타협이나 양보도 없이 명확한 논리로 그들의 오류를 논박하였다. 그는 수사학적 방법에 따라 뛰어난 문장을 구사하면서도 간결하고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르랭의 비첸시우스(+450년)는 그의 문체에 대해, “말마디 하나하나가 곧 문장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 정도이다”라고 평하였다. 그러나 그는 206년경부터 몬타니즘이단(가톨릭 신문, 교부학 18, 1993·1·17 참조)에 물들기 시작하였고, 2~3년에 이 이단의 지도자가 된 후에는 가톨릭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다혈적인 성격과 극단적이고 과격한 성품에서 연유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사망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220년경으로 추산되며, 끝까지 가톨릭 교회에 돌아오지 않았다. 따라서 떼르뚤리아누스의 저서들을 읽을 때에는, 저술된 연도가 다음의 시대구분에 어디에 속하는 지를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제1시기: 가톨릭신앙 시기(195~206년), 제2시기: 반(半)몬타니즘 시기(206~212년), 제3시기: 몬타니즘 신봉시기(213~220년). 제2시기까지는 저서들의 내용면에서 가톨릭적 신앙에 별 문제가 없지만, 제3시기의 저서들은 주로 교회론적 측면에서 가톨릭교회의 제도들에 대해 과격한 비판을 하고 또 윤리적인 측면에서 지나친 엄격주의로 흐르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어쨌든 떼르뚤리아누스는 초기 그리스도교 라틴 문학의 시조로 평가받을 정도로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는 신학분야에 있어서 라틴어 용어들을 정착시킨 결정적인 공로자이며, 명실 공히 첫 라틴교부이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 그리고 로마의 히뽈리뚜스와 같은 시대의 인물이다. 한마디로 오리게네스가 희랍교부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고 한다면, 떼르뚤리아누스는 라틴교부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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