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앞의 말씀은 ‘복음에서의 진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의 요약이 그 한 문장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하느님의 사랑이요, 축복인지 인간은 생각만 해도 감격이 철철 넘치게 됩니다. 사람은 과연 하느님의 보통 작품이 아닙니다. 그분의 영이 다 담긴 그분 자신이요 그분의 분신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들을 보내실 때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히 감춰계신 분이었습니다. 또한 지존하신 분이 구차스럽게 당신 자신을 소개하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세상을 존경하셨고 인간 각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당신의 외아들과 맞바꿀 수 있도록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성서는 그분 자신의 모습과 애정을 환하게 밝혀줍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느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첫 장면에 보면 “하느님의 기운이 물 위에 휘돌고 있었다”(1,2)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기운’은 성령을 말합니다. 이것을 다시 풀어서 말씀드리면 아버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기운’이신 성령을 통하여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은 성령께서 이 우주와 세상 안에 역사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그 예전에도 사랑이 있었고 도덕이 있었으며 효가 있었고 충이 있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모습은 희미했고 분명하진 못했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하늘이나 땅을 신으로 모시기도 하고 호랑이나 곰, 또는 바람이나 비 등을 신으로 모셨던 것을 보면 분명하진 않지만 하느님을 찾아나서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태어났을 때에야 비로소 하느님의 윤곽이 제대로 잡혀지게 됩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무엇을 원하시는지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모습과 말씀은 감춰져 있었습니다. 후에 예언자들이 등장해서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목소리를 전달할 때도 하느님은 살아계신 분으로 백성들은 이해되었지만 과연 어떤 사랑과 꿈을 가지고 계신지는 몰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정적으로 당신 모습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은 당신의 외아들인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주실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너무나 중요하고 하느님 자신의 일이었기 때문에 성부와 성령께서 예수와 함께 일치된 모습을 보여주셨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더 이상 당신의 비밀을 감추지 않으셨고 다 보여주셨고 다 내놓으셨습니다. 성자는 늦게 등장하셨으나 성부와 성령과 함께 계셨고 세상 창조 때에도 성자는 함께 참여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을 온전하게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막연하신 분은 아닙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의 세계를 모릅니다. 어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고 있고 무슨 꿈을 가지고 있는지 자녀들은 모릅니다. 부모가 아무리 설명해줘도 꼬마들은 한마디도 못 알아들을 때가 있습니다. 커봐야 알 수 있습니다. 커서도 어느 땐 모르고 늙어봐야 뭘 어렴풋이 알 수 있듯이 우리도 나중에 그분 나라에 들어가 봐야 압니다. 그분을 눈으로 뵈올 때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각각 독립된 위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셋은 하나요 하나는 또 셋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하느님은 한분이시면서 동시에 셋이라는 공동체의 하느님이십니다. 이것은 그분의 본체이시기에 우리가 알아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냥 믿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느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느님은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질서와 조화와 일치가 하나로 어우러진 위대한 신비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을 만나고 닮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신앙입니다.
성삼은 한마디로 사랑이면서 무한하며 영원합니다. 그 이름 안에 우리 존재가 있고 그 말씀 안에 우리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 우리 목적이 있습니다. 성삼은 인간의 찬미가 필요치 않으나 인간의 흠숭은 그분께 영광이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참 행복은 그분을 찾고 부르는 신앙 안에 있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신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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