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체칠리우스 치쁘리아누스는 떼르뚤리아누스에 이어 제2대 아프리카 교부이다.
그는 200~210년경 카르타고의 유복한 이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수사학과 웅변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246년에 신앙에 귀의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사제품을 받았으며, 249년 초에는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었다. 258년에 순교하기까지 약10년 간의 주교생활은 험난하였지만, 교회사 안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만한 공적을 남겼다. 그가 주교품에 오르자 내심 경쟁자였던 노바뚜스를 중심으로 한 일부 노사제들의 반발이 있었다. 그리고 주교로 서품된 지 1년도 못 되어 데치우스 황제의 혹독한 박해를 겪었으며, 박해가 끝나자 카르타고 교회는 배교자들의 처리문제에 대한 논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는 배교자들이 죽을 위험이 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과오에 상응한 공식적인 참회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펠리치씨무스 부제는 주교의 반대자들을 규합해 배교자들을 쉽게 교회에 받아드려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주교에게 정면으로 대적하였고, 여기에 주교 선출 당시 경쟁자였던 노바뚜스가 가담함으로써 상황은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로마교회 안에서도 이와 비슷한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치쁘리아누스는 로마의 꼬르넬리우스 교황과 보조를 맞추면서 반대자들에 대처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251년에 열린 카르타고 주교회의에서 치쁘리아누스의 설을 공인함으로써 해결되었다.
252년 아프리카 지역에 혹심한 페스트 전염병이 발생하자 교회는 새로운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교 때문에 하늘이 분노하여 전염병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치쁘리아누스는 저서들을 통해 이러한 낭설을 반박하면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단자 세례논쟁
치쁘리아누스는 생의 말년에 이단자들의 세례문제에 대한 논쟁을 하게 되었다. 252년 초 막뉴스라는 사람이 치쁘리아누스에게, ‘만일 이단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 가톨릭교회에 들어오게 될 때 그에게 다시 세례를 주어야 하는가’ 하고 질문하였다. 치쁘리아누스는 이단자들의 세례는 무효이기 때문에 다시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로마교회와 알렉산드리아교회는 이와는 다른 전통을 갖고 있었다. 아프리카교회 자체 내에서도 주교들이 이 문제에 대한 확실한 결정을 요청하였으므로 255년과 256년에 카르타고에서 주교회의를 열어 치쁘리아누스의 설을 재확인하고 그 결정사항을 로마의 스테파누스 교황에게 알렸다. 그러나 교황은 뜻밖에도 단호한 어조로 “전승된 것 이외에 아무것도 새롭게 해서는 안 되며”, 이단자가 오면 다시 세례를 베풀 필요 없이 참회 예식에 받아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답을 보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의 전통이니 따르지 않을 때 주교는 물론 아프리카 교회가 파문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에 앞서 교황은 같은 문제로 소아시아 교회에 파문을 경고한 바 있었다. 이단자들의 세례문제는 한 지역교회에 국한되지 않고 이미 보편교회의 문제로 부각되었기 때문에 교황은 단호한 조처를 취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치쁘리아누스는 교황의 고압적인 명령에 대해 256년 9월에 재차 카르타고 주교회의를 개최하였고 주교들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주장을 재확인하였다. 이로써 이 문제는 치쁘리아누스와 스테파누스 사이의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아프리카교회와 로마교회 사이의 대립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치쁘리아누스는 로마교회와 단절된 상태로 있을 수는 없었다. 그가 「가톨릭교회 일치」란 그의 저서에서 그렇게도 강조해 온 교회의 일치가 깨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로마교회와 카르타고교회 사이의 이 대립은 뜻밖에도 박해로 인해 논쟁이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257년에 박해를 강화하면서 제국 내에 특히 주교와 사제들을 처단하도록 하였다. 스테파누스는 257년 8월2일에 순교하였으며, 치쁘리아누스도 257년에 체포되어 빠떼르누스 총독의 재판을 받고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는 년 후 소환되어 갈레리우스 막시무스 총독에 의해 새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이신교께 제사를 지내라는 총독의 명령을 거부하자 258년 9월14일 카르타고 근교에서 참수됨으로써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교회는 그의 축일을 9월16일에 지낸다.
모범적인 사목자
치쁘리아누스는 모범적인 사목자로서 실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떼르뚤리아누스를 스승으로 여기고 그의 글을 매일 읽었다고 한다. 사실 치쁘리아누스의 많은 저서들은 떼르뚤리아누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역력히 볼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성격과 교회에 대한 태도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날카로운 논리에 바탕을 둔 논쟁적이며 극단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떼르뚤아누스에 비해 치쁘리아누스는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목자로서의 아량과 지혜와 중용의 정신을 유지하면서 파국적인 극단에 결코 빠지지 않았다. 필자는 치쁘리아누스의 대표적인 3개의 저서, 즉 「도나뚜스에게」와 「가톨릭교회 일치」와 「주의 기도문」을 「교부총서」제1집(분도출판사, 1987년)에서 해제와 함께 대역본으로 번역하였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