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17,7-10)
하루종일 밭에서 힘빠지게 일하고 돌아와서 또 집안일을 해야하고 배고픔을 참고 먼저 주인의 밥상을 차려야 하는 종이 있다면 그는 분명 노예이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하기로 하고 고용된 하인은 자기 할 일을 하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고 주인은 주인대로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현대와 같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주인은 분명 악덕 주인이다. 그러나 예수 시대에는 이와 같은 주인과 종 관계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사회적 현실을 배경으로 하여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는 교훈으로 비유를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누가 자기 종이 밭일을 하거나 양을 치고 돌아왔을 때 ‘어서 와서 식탁에 앉아 밥을 먹어라’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느냐?”
여기서 ‘너희 중에 누가…냐?’라고 묻는 형식은 상황을 가정하여 시작하는 말투로 ‘단연코 아무도 없다.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은 것은 자명한 일이다’라는 부정적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형식이다(루카 11,5참조). 그런 사람은 없지 않느냐 라는 당연한 사실의 인정을 촉구하고 있다.
우리네 정서와는 아주 다르다. 우리는 ‘수고했다. 어서 밥부터 먹어라’라고 대답하는 것이 통례일 것이다. 예수께서도 매정한 주인을 두둔한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다. 다만 이와 같은 상황이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느냐는 것을 가정하고 있는 것뿐이고 목적은 이러한 상황을 전제로 하여 제자들이야 말로 노예처럼 일해야 되고 일한 다음 동정을 사는 반대급부적인 보수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훈시하시려는 것뿐이다.
하루 종일 일을 했지만 제자들에게는 일의 끝이란 있을 수 없다. 주인에게 저녁식사를 준비한 다음 허리에 띠를 띠고 주인이 식사하는 동안 시중을 들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저녁을 먹어야 한다.
유대아인들은 길게 늘어진 옷을 입었고 옷이 일하는데 거추장스럽지 않게 하기 위하여 허리에 띠를 띠었다. 그러니 긴 옷을 입은 것은 주인이나 지도자의 옷차림이었고 띠를 띤 것은 종 또는 노예의 상징이었다. 수도자들이 긴 수단에 띠를 띤 것은 하느님의 종 또는 노예라는 것을 상징한다.
종이 주인의 명령을 수행했다 해서 주인의 사례나 인사를 받을 권리는 없다. 이것이 당시의 사회적 논리였다. 예수께서 ‘그 종이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라고 반문하신 것은 위와 같은 상황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할 때에는 사회적인 계약에 따른 통념대로 고용자에게 매정하면서 자기들이 하느님께 봉사하는 일에는 그 반대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공경의 표로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종교생활을 하면서 하느님께 늘 반대급부의 보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사실 그 누구도 하느님께 대해서 해야 할 의무를 다 했다고 장담할 사람은 없다.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이 우리의 공로라고 주장할 수 없으며 우리가 무슨 선행을 했다 해서 하느님께 그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십계명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의무일 따름이지 계명을 지켰다고 해서 하느님께 반대급부의 보상을 주장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저 하느님께 봉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웃에게 봉사할 따름이다. 우리는 이렇게 그저 봉사함으로써 자유를 만끽한다.
모름지기 예수의 제자된 사람은 남의 종이 된 심정으로 일해야 하며 그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변변치 않은 일을 하면서 반대급부의 보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저 할일을 했을 뿐 나는 종일 따름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은 그저 주시는 선물이지 잘한데 대한 반대급부가 아니다. 마음을 비우고 봉사하는 자는 마음으로 가난한 자이다. 그들에게 하늘나라가 약속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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