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디오니시우스는 오리게네스의 제자들 중에 가장 뛰어난 제자였다. 오리게네스의 후임으로 알렉산드리아의 교리학교 교장(敎長)이었던 헤라클라스가 232년에 주교로 서품되자, 디오니시우는 그의 뒤를 이어 교리학교의 교장이 되었으며, 247년에는 다시 그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257년에 있었던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에 신앙고백을 한 후에 먼저 리비아로 그 다음 이집트의 마레오티오데라는 곳으로 귀양을 갔었다. 귀양에서 돌아온 후에도 그는 전쟁과 정치적 혼란, 빈궁과 베스트 같은 전염병 등으로 인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교구를 다스리다가 265년에 연로한 나이로 선종하였다. 디오니시우스는 사후에 ‘위대한’(대)이란 칭호를 받았는데, 이는 생전에 지녔던 그의 굳건한 믿음과 용기 그리고 사목적 열성을 말해준다. 사실 에우세비우스는 「교회사」 제6권 후반부와 제7권 대부분에서 디오니시우스에 관해 소개할 정도로 그를 교회의 중요한 인물로 부각시키고 있다. 교회는 그의 축일을 11월17일에 지낸다.
저서와 서간
디오니시우스 주교는, 관할 교구의 사목자로서 충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보편 교회의 평화와 일치를 도모하고 교리상의 논쟁들을 해결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데치우스 박해 후(251년)에, 그는 칼타고의 치쁘리아누스 주교와 마찬가지로, 파문 받은 배교자들을 합당한 참회절차를 거처 교회에 다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교회 안에 참회예식을 정착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그리고 251년 3월에는 로마교회의 주교로 선출된 꼬르넬리우스 교황에 반대하여 가(假)교황이 된 노바씨아누스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일치를 이루도록 촉구하였다. 그 후에 스테파누스 교황(254~257년 재직)과 칼타고의 주교 치쁘리아누스가 이단자들로부터 받은 세례의 유효성 문제를 두고 서로 심각하게 대립하자, 디오니시우스 주교는 스테파누스 교황과 그의 후계자인 식스투스 2세(257~258년 재직) 교황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어 평화를 이루도록 중재하였다. 그 후 그는 다시 성삼론 논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한편 펜타폴리스(지금의 리비아) 지방의 프톨레마이스의 주교는 동료 주교들로부터 사벨리우스의 성부수난설적 요소가 있다는 비난을 받게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주교 당사자와 반대자 양편이 모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디오니시우스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디오니시우스가 프톨레마이스의 주교를 단죄하는 답장을 보내자, 프톨레마이스의 주교는 이에 불복하면서 로마의 디오니시우스 교황(259~268년 재직)에게 사람들을 보내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의 편지에 삼신론(三神論)적 요소가 있다고 고발하였다. 로마의 디오니시우스 교황은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 주교에게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자, 그는 성삼에 관한 자신의 신앙고백을 담은 저서 「반박과 변호」를 동봉하여 답장을 보냄으로써 오해를 풀었다.
한편 오리게네스의 반대자들 중에 하나였던 알시노에의 네포스 주교는 구약성서의 몇몇 구절들과 신약성서의 묵시록 20장을 근거로 하여 성서의 약속은 현실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면서 천년왕국설(千年王國說)을 주장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에도 이 설이 에집트 전역에 유포되어 있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6일간 세상을 창조하신 다음 하루를 쉬셨다는 이야기(창제 1~2장)와, 하느님께서는 하루가 천년과 같다는 시편 89, 4의 말을 근거로 하여, 천지창조부터 6천년이 지나면 천 년간의 그리스도 왕국이 묵시록 20장에 묘사되어 있는 대로 이 지상에 실현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디오니시우스 주교는 「약속론」(約束論)을 저술하여 이 이단적인 설을 반박하였고, 직접 알시오네에 가서 3일간 머물면서 토론을 벌린 결과 이 설의 대표적 옹호자인 꼬라치온을 승복시켰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약속론」 제2권에서 그는 묵시록의 저자가 사도 요한이 아니라 다른 요한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천년왕국설이 사도적 기원과 연유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끝으로, 안티오키아의 주교가 된 사모사따의 바울로가 성자의 신성을 부인하는 문제가 발생하여 안티오키아에서 주교회의(265년)가 열리게 되었는데, 이 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디오니시우스 주교는 노환으로 참석하지 못하고 265년에 사망하였다.
그 외 그의 저서로는 「자연론」(自然論)과 여러 서간들이 있다. 서간들은 전체적으로 전해져 오지 않고 다른 문헌들에 인용되어 단편적으로 전해져 오는데, 특히 주목할 것은 그의 부활축일 사목서간들이다. 이 사목서간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매년 사순절 초에 이집트 지방의 여러 교회들에게 보내는 것으로서, 그 해의 사순절 시작과 부활축일 일자를 통보하면서 아울러 주님의 부활절을 타당하게 준비하기 위하여 신도들이 어떻게 사순절을 지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사목적인 권고를 담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9세기까지 계속되는데, 이 사목서간의 창시자가 디오니시우스 주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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