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우리생활의 문제점이 여러 가지가 많지만 그 중에서 특히 자연파괴와 생명의 경시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어나는 인구증가에 공포심과 새생명을 받아들이는데 대한 의구심 두려움 등등의 문제가 심각하다. 그래서 교황청에서도 「인간생명(Humanae vitae)」 회칙을 발표하여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생명경시 사상을 경고한 바가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가장 큰 생명문제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안고 가장 귀중한 생명의 실체와 그 목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생명은 무엇인가
오늘날 생명문제와 결부해서 일부에서는 ‘생명연구’ 또는 ‘생명과학’이란 기치를 들고 도리어 생명의 존엄성을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생명에 대해서는 두 가지밖에 다른 더 말이 있을 수 없다.
첫째로 생명의 정의, 생명의 실체에 대한 문제이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생명은 신비스러운 것’ 이것뿐이다. ‘생명의 신비성’ 앞에는 어느 누구도 어떤 과학자도 말을 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생명은 이 자연계에 존재하지만 그것은 신비의 세계와 연계되어 있기에 생명을 어떤 자연현상과 같이 과학의 대상이나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다만 생명의 신비성을 수용할 수 있는 우리의 자세문제, 생명의 존엄성을 어떻게 설명을 하고 어떻게 수용하는가가 문제될 수밖에 없다. ‘생명의 신비성’. 이것은 결코 인간능력의 한계점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에 의해서 혹은 인간능력에 의해서 좌우되는 대상이 아니다. 생명은 절대적인 것이고, 유일한 것이고,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이다.
‘생명의 신비’는 곧 신비의 세계 즉 하느님 능력의 차원이다. 그래서 인간생명회칙 에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생명 전달의 임무수행에 있어서 부부가 정당한 방법이라고 해서 완전히 제멋대로 독단적으로 자유로이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창조계획에 순응해야 한다”(인간생명 회칙 한국어 번역판 P17).
생명의 주인, 다시 말해서 생명의 원천은 곧 하느님이시다. 그의 생명자체(철학에서 존재자체 또는 자존자라고 표현함)에서부터 분여된 것이 오늘 이 자연의 생명현상이 이루어진 것이다.
생명의 존재이유
모든 사물에는 그 사물의 나름대로의 존재이유가 있다 생명은 왜 주어졌는가? “생명은 결실을 위해서”
생명은 그 자체가 살아야 하는 것이고 그 삶에는 곧 삶의 결과인 결실이 뒤따라야 한다. 식물의 예를 들어보자!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열리지 않는다면 그 사과나무는 존재 이유가 없다. ‘생명은 결실을 해야 한다’는 대전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생명을 어떻게 보존하며 키워나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가장 귀한 인간생명의 결실은 무엇인가? 그 생명 그 자체는 신비스럽게도 그의 원천이 하느님의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접목이 되어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에로 자신을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 생명에 대한 신학적인 결론이다.
생명이 본래 주어진 목적 다시 말해서 인간 창조의 근본이념은 우리가 선택하고 우리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생명의 주인’, 그분의 뜻을 따라 영원한 결실로 가야하는 것은 생명을 받은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론적인 사실이다. 그래서 인간생명 회칙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하느님의 선물을 사용하면서 부분적으로나마 그 선물의 의의와 목적을 파괴한다면 인간 본성에 위반되고 부부의 밀접한 관계에도 위배될 뿐 아니라 또한 하느님의 계획과 그 거룩한 뜻에 항거하는 것이 된다”(회칙 P19).
생명에 대한 항거는 바로 죽음이다. 생명은 죽지 말아야 한다. 자연과학적으로 답변할 수 없는 것이 생명의 신비성이기에 죽음에 대해서도 과학은 답변할 수 없다. 오로지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만이 답변한다. 그래서 그분은 말씀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마는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적다”(마태 7,13-14).
결론
생명은 존엄하다. 신비스럽다. 그래서 생명은 신비의 세계를 거치지 않고는 답변이 있을 수 없다. 자연 속에 스며있는 생명은 바로 하늘의 신비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그 뜻을 밝힐 수 없고 그 목적도 있을 수 없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생명의 존엄성은 곧 하느님의 신비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받은 인간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것을 결실시켜야 한다.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죽더라도 영원히 살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다. 그의 부활생명에 참여하는 것만이 우리 생명의 유일한 결실의 길이고 그 목적이 될 수밖에 없다.
역사상에 어느 누구도 생명에 대한 답변이 없었기에 인류는 불안을 느껴왔다. 드디어 그리스도의 강생은 곧 생명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였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히 삶을 믿나이다.” 이런 신조를 갖고 어렵고 괴롭고 좁은 문이지만 영생의 결실을 위해서 우리는 희망으로 열심히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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