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집을 더 잘 짓기 위해 집을 철거했을 경우, 철거민이라고 부르지 않는데서 알 수 있듯이, 철거민이란 ‘타의로 철거를 당해 주거 및 생활사정이 더 나빠진 사람’들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럼, 요즘도 그런 사람이 있을까? 올림픽을 전후해 철거민이 많았던 기억은 있는데….
그러나 불행히도 서울시에서만 그런 사람들이 약 19만명이고, 현행 제도가 바뀌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20~40만명의 사람들이 더 고통 받을 수 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현재 재개발사업을 시행하고 있는 44개 지역에 거주하는 세입자 약 8만7천명과 53개 지구 주거환경 개선사업 중에서 주거대책이 없는 약 6만2천명의 세입자, 비닐하우스촌에 거주하는 주민 약 4만명, 기타 택지개발사업 등으로 철거되는 주민 1만명 정도가 지금 ‘철거민’의 이름이 붙어 있다. 그 중 재개발구역의 세입자를 먼저 생각해 보면,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절대 ‘철거민’이 될 수 없다. 89년 5월 이후 사업을 착공한 재개발구역에서는 세입자용 영구임대주택을 반드시 짓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개발에서는 철거민문제가 있을 수 없고, 다만 세입자들이 너무 과한 요구를 하고 있어서 문제가 될 뿐이라는 것이 정부 관계자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기가 막힌다. 89년 이후, 4년이 지난 오늘까지 단 한명의 세입자도 재개발구역에 건립한 영구임대주택에 입주하지 못했으며, 더구나 서울시에는 영구임대주택을 사들일(현재는 민간 재개발조합이 지으면서 서울시가 나중에 사서 세입자들에게 임대한다) 돈이 한 푼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특히 민간 재개발조합은 소형 영구임대주택이 들어서면 집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세입자들을 마구 쫓아내고 있으며, 세입자들이 아우성이라도 칠 양이면 마지못해 4백~5백만원의 돈으로 해결하려 하고 있다. 또 영구임대주택을 지을 재원이 없는 서울시는 이 같은 조합의 탈법행위를 은연중에 조장하고 있다. 그 결과 “기왕 주기로 한 영구임대주택이니 증명서라도 하나 해 주시오”하는 세입자들의 요구를 막기 위해 경찰이 공포탄을 쏘고(청량리 1동), 철거반원들이 주민은 폭행(청량리 1동, 신정동)하는 사태가 계속되고 있다. 물론 신한국의 주술에 도추된 언론이나 일반 국민들은 냉담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 같은 세입자 문제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몇 가지 미리 알아야 할 점이 있다. 첫째, 재개발사업은 웬만한 지역에서도 개발이익이 1~2천억 이상 생기는데도 저소득층을 보호한다는 취지에서 그것을 환수하지 않는다는 점, 둘째, 그러나 실제로 그 지역에 살던 저소득층들이 재입주하는 수는 10%도 안 된다는 것, 셋째, 재개발사업 전에는 평균 10평 정도에 불과하던 집이 30평 내외의 아파트로 바뀌어서 도저히 도시빈민들은 살 수 없다는 점, 넷째, 이처럼 개발이익이 외지인들에게로 돌아가는 데도 정부는 저소득 세입자를 위한 임대주택 건설재원이 없다고 아우성이라는 것, 결국 재개발사업은 저소득층의 주거환경을 개선한다는 빌미로 엄청난 특혜를 주고 있지만, 그 이익을 향유하는 사람들은 전혀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재개발사업은 이제 공공이 직접 해야 된다. 재개발구역 면적의 50%이상이 국공유지인데도 이들 지역을 민간에서 재개발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래서 수천억에 이르는 개발이익을 공공이 직접 환수하여 이를 저소득층 주택문제 해결을 위해 사용해야 된다. 개발이익을 환수하여 공공의 목적에 맞게 재활용하지 않는 이상, 어떤 제도 개선도 돈의 위력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그렇게 사이좋던 ‘도시속의 농촌’을 파괴하는 것도 이 돈이 아닌가.
다음으로, 비닐하우스에 사는 사람들은 문제가 좀 더 복잡하다. 서초동의 법원, 검찰청 주변이나 수도권 택지개발 예정지구 등에 들어선 비닐하우스는 지난 89년 이후 폭등하는 전월세 값을 감당하지 못하는 도시빈민들이 급조된 농사용 비닐하우스에 지은 방 한 칸을 3백~4백만원에 사들이면서 형성되었다.
그런데 이런 지역의 문제에서는 양비론이 존재한다. 우선 주민들에 대해서는 ‘새끼 투기꾼’이라는 비난이 있다. 뭔가 대책을 바라고 몰려든 것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 비닐하우스촌의 20~40%정도는 못 쓰는 농짝만 갖다 둔 빈집이기도 하다. 다음으로는 땅주인과 정부의 책임이다. 얼마나 땅이 많았으면 강남의 금싸라기 땅들을 빈 땅으로 늘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살 지경이 되었겠으며, 정부도 택지개발 예정 지구에 비닐하우스가 들어서는 사태를 막지 못했으니 ‘원인제공자’로서 그 책임을 면할 길 없다는 것이다. 또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처럼 대도시 빌딩사이 공터에서 화재와 철거, 악취, 멸시의 고통을 무릅쓰고 살 수 밖에 없는 도시빈민을 양산한 것은 이 사회 모두의 책임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들 지역의 철거민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 해법은 무엇일까? 대책은 역시 ‘영구히’ 임대하기 때문에 ‘재산가치’가 없는 영구임대주택이다. 즉, 비닐하우스촌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재산 상태나 이주동기 등을 면밀히 검토한 뒤에 영구임대주택을 공급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해야 되며, 앞으로는 더 이상 비닐하우스촌이 생기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다(정부가 택지개발 예정지구의 경비를 맡긴 회사가 비닐하우스를 8백 채나 지어 팔은 경우도 있다).
그의 주거환경 개선사업의 세입자 문제 등도 결국 영구임대주택 이외에는 풀 이법이 없다. 보다 많은 영구임대주택을 통해서만 전반적인 전월세값 안정과 저소득층 주택문제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영구임대주택을 짓지 않으려는 정부의 태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지난 6공화국 초기, 원래 25만호를 건설하기로 했던 영구임대주택을 ‘영세민이 더 이상 없어서’ 19만호만 짓고 말더니, 이제는 아예 ‘영구’라는 말을 빼고 ‘공공임대주택’을 강조하면서 은연중에 전혀 짓지 않겠다는 인상을 풍기고 있다. 정부는 돈이 없어서 못 짓는 것이 아니다. 재개발구역에서 헐값에 팔아넘긴 30~40만평의 국공유지만 제대로 활용해도 영구임대주택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지금도 60만평의 금싸라기 같은 국공유지가 재개발구역에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강제, 폭력 철거만은 없어져야 한다. 경위야 어떻든 간에, 비를 피하고 가족이 잠자는 곳에서 얻어 맞아가며 쫓겨나야 된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강제철거과정에서 22명이 피살, 자살 등으로 목숨을 잃었고, 2백명 이상이 구속되었으며, 1천여 명 이상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바 있다. 이런 비인간적인 일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그런 점에서 김영삼 정부의 신한국은 이미 구한국의 낙인을 받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또 모든 철거민들이 길거리에서 ‘옛날 방식’으로 싸울 수밖에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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