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댁은 남도의 작은 섬이다. 윤선도가 제주도로 귀양 가다 머문 보길도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윤선도는 그곳에서 ‘어부사시사’를 지었다. ‘세연정’이라는 아름다운 정자도 세우고 정원도 꾸몄다. 90년대 후반부터 전복 양식이 활발해 젊은이들도 많고 섬에 활기가 넘친다.
아직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이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추석을 맞아 시댁에 내려갔다. 시어머니의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외국말처럼 들렸다. 작은 통통배를 타고 강섬돔 낚시도 해봤다. 시아버지께서 직접 손질해 두툼하게 썰어주신 도미회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웃집 할머니가 서울 새댁 왔다고 앞마당에서 딴 큼지막한 무화과를 가져오셨다. 성경에서만 접했던 무화과를 직접 보다니! 신기하고도 반가웠다. 대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남쪽 섬마을의 모든 것이 신기했다.
하지만 귀경 길, 해남에서부터 차가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24시간을 차에서 보내고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명절의 교통 체증이 이런 거구나’ 하는 경험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차가 밀리자 시댁에서의 즐거웠던 기억은 사라지고, ‘내가 결혼을 잘못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 때였다. 영암 근처 도로변에서 갓 딴 무화과를 팔고 있었다. 잘 익은 무화과의 달짝지근하면서도 이국적인 맛은 다시 나에게 위안을 줬다.
내가 좋아하는 복음 성가가 있다.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어도/ 우리에 양 떼가 없어도 난 야훼로 즐거워하리/ 난 야훼로 즐거워하리/ 내 구원의 하느님을 위해 기뻐하리라”라는 찬양이다(하바 3,17-18 참조). 무화과와 포도 같은 일용할 양식이 없고, 살아갈 기반인 양떼도 없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구원자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바로 이러한 순간에 필요한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본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의지하며 믿었던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는 완전한 절망에 부딪힐 때가 있다. 이러한 순간이 오더라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주 하느님은 나의 힘. 그분께서는 내 발을 사슴 같게 하시어 내가 높은 곳을 치닫게 해 주신다”(하바 3, 19)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무화과 나뭇잎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메마르고 갈라진 마음이지만 풍성한 열매를 맺어 주실 하느님을 믿고 찬양할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다음 주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