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동 화백의 ‘순교자의 얼굴, 예수의 얼굴’.
그가 세례를 받기로 결심한 것은 6·25 전쟁 이후다. 전쟁을 겪으며 인간 본질에 대한 호기심이 회의감으로 점점 바뀌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학창시절 친구가 사제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하느님의 자녀가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노년에 이르러 그의 작품은 종교에 좀 더 천착해갔다. 그의 작품 중 구상(具象)이나 반(半)추상 작품 대부분이 종교적인 내용이다. 고통을 상징하는 ‘가시 면류관’을 주제로 한 작품을 비롯해 천지창조 등 다양하다.
1957년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조 화백은 논산 대건고등학교를 시작으로 10여 년 간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고, 1973년 미국 휴스턴대학 객원교수를 지냈다. 1980년 한국미술협회 이사, 1984년 성신여대 교수 등을 역임했다.
그는 2015년 한국교회 성미술 발전에 공로한 기여를 인정받아 제19회 가톨릭미술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그동안 ‘천주교·개신교·불교 연합 전시회’ 등 가톨릭미술가회가 기획한 행사를 이끌어왔으며,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의 ‘김범우 초상’을 비롯해 충북 제천 배론성지의 ‘돌아온 탕아’ 등의 작품을 제작했다. 가톨릭미술상 수상 당시 조 화백은 “나이가 허락된다면 예술성이 높은 그림을 제작해 하느님께 은혜를 갚아드리고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건강하던 그는 10여 년 전 당뇨 합병증으로 시각 장애를 갖게 됐다. 하지만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추상은 어차피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는 것”이라며 “보이지 않아도 그릴 수 있으며, 오히려 더 새로운 추상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손자의 얼굴을 주제로 한 작품도 손으로 얼굴을 만져 완성했다.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눈이 좋았을 때도 저는 세상을 만지고 느껴야만 그릴 수 있었고, 그림이 돼야만 그것이 저의 세상이기도 했습니다.”
조윤신씨는 아버지를 ‘조용한 혁명가’라고 표현한다.
“아버지께서는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대에 입학하셨습니다. 입학금은 물론 그림도구를 살 돈이 없어 헌혈을 해서 돈을 마련하실 정도로 미술에 헌신적이셨어요. 아버지에게 그림은 본능이며 존재의 이유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