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더 이상 발달할 과학이 없는 것처럼 또는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진리 그 자체인 것처럼 잘못 인식하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소위 첨단과학 지식이나 합리적 사고라는 것이 과연 하느님이 정해놓으신 우주의 진리에 백분의 일에나 미칠까?
아무리 개체발생은 종족발생을 되풀이 한다고는 하지만 난자와 정자가 모체에서 수정되어 온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갖추어 가는 과정을 보면 하느님의 천지창조를 보는 듯 신비하기만 하다.
모체에서 난자와 정자가 만나 수정란이 된 후 자궁 내에 착상되어 자라게 되는 과정 중에 과연 어느 순간에 영혼을 부여 받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시점에서 인간과 영혼을 굳이 분리해서 생각할 이유가 없으니 수정되는 순간부터 이미 훌륭한 인간임을 의심하여서는 안된다. 인간으로서의 운명을 결정할 모든 정보가 이 순간에 정해진다. 이렇게 형성된 수정란은 곧이어 세포분열을 통해 2개, 4개, 8개, 16개 등의 세포들로 늘어나서 배아, 태아를 거쳐 약 2백65일 후쯤에는 바깥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단순히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태아를 인간이 되는 준비과정에 있는 개체정도로 생각하거나 인간으로서는 아직 불완전하다고 생각하지 말자. 중요한 것은 영혼이 언제부터 존재하는가, 언제부터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 생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초기 단계의 인간의 씨앗은 인위적으로 그 생명을 앗지 않는 한 태어나서 한 80년간 인간으로서의 삶과 구실을 다할 것이라는 것이며 따라서 존귀한 인간의 생명 그 자체라는 것이다.
수정된 순간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총 45세대의 세포분열을 하게 되는데 이 중 41세대의 세포분열이 태중에서 일어나는 것만 보아도 이 시기가 얼마나 중요하고 신비하며 엄숙한 가를 짐작케 한다. 비록 2백65일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을 자궁 안에 있기는 하지만 기실 인간의 형태로서의 완성은 임신초기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나머지 대부분의 기간은 그저 자랄 뿐이라는 것과 요즈음 의학이 발달하고 보니 임신기간의 절반도 못 지나고 조산된 신생아들도 생존하게 되었다는 것을 깊이 음미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1년 동안 시행되는 인공임신 중절수술은 비록 공식적인 통계는 아니지만 약 1백만에서 1백50만 건이 넘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전 세계를 통틀어 이런 무책임한 부모들이 많은 나라가 우리를 빼놓고 또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여성들의 교육수준이 그렇게 높고 자식 위하기에서 둘째가라면 서운해 할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더 답답한 것은 가톨릭 신자들의 경우 낙태율이 비신자들보다 약간 높다는 보고마저 나오고 있는 것이다. 빌링스씨 법 등 주기법에만 의존했다면 그러고도 비신자들보다 더 많은 수의 자녀들을 낳지 않았다면 이 통계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잘못된 피임이 낙태를 낳는 현실이기는 하지만 하나는 임신을 하지 않겠다는 동기일 뿐인데 반하여 다른 하나는 귀중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행위이고 보면 결코 이 둘을 이란성 쌍둥이 정도로 비슷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 행여 ‘인간생명’(Hu-mane virae)회칙에서 이 두 문제가 다 같이 언급되었다 하여 동일차원의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다.
피임을 필요이상으로 평가절상 시키고 낙태를 평가절하 시키는 오류는 인간의 이기주의적 발상에서 근원하게 되겠지만 이를 합리화시키려는 마음은 기실 이 양자를 동일시하는 잠재의식에도 크게 힘입게 된다. 의학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이들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만일 있다면 인구조절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뿐이리라.
피임은 동기가 문제가 되는 것이지 방법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 피임을 금한다든지 비생산적인 성을 죄악시한다면 문제는 다르다. 그러나 교회에서도 피임을 허용하고 임신을 할 수 없는 여성에게도 혼인성사를 주고 있다. 방법에 있어서 제한을 받고 있는 피임방법들이 비자연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권장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자연법을 머리에 떠올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의학이 발달되면서 그의 궁극적인 목적에 부합되는 방법은 내용에 별 관계없이 비자연적이라고 비난받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낙태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낙태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출산을 앞두고 오직 시간만을 기다리는 생명을 그것도 자신의 자식을 죽이는 분명한 살인행위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낙태와 피임은 무슨 큰 죄를 피하기 위하여 작은 죄를 합리화 시키게 되는 선택의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낙태는 ‘원치 않는 임신’ 때문에 생긴다고 믿고 있는데 반해 우리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이기주의적 발상에서 많은 낙태가 자행되고 있음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임신인줄 모르고 무슨 약을 먹었다는 등의 이유를 들고 아기가 기형이 될까 걱정이라며 낙태를 원하기도 한다. 시중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이런 약들이 결코 기형아 발생률을 높이는 것도 아니요 인공임신 중절의 적용이 되는 것은 더군다나 아니다.
또 태아 성감별에 의해서나 심지어는 점을 쳐보고 아기가 딸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자기 자식을 희생시키는 비정한 엄마들도 더러는 있다. 남녀 성비의 괴리 때문에 법으로조차 금지되고 있는 이 태아 성별감정은 그러나 계속되는지 원래 여아 100 출산에 남아가 104이어야 하는 것이 1983년에 109, 85년에 117, 90년엔 119까지 되는 곳이 있었는데 이것이 60년대의 106이나 70년대의 107과 비교하여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를 생각해보며 한심한 생각까지 들게 한다.
어느 사회학자의 말대로 남자의 수가 많으면 반드시 일어난다는 전쟁, 살인 등 범죄의 급증, 매춘의 증가, 동성연애의 보편화가 현실로 나타날까 걱정일 뿐이다. 또 의학적으로 모체의 건강을 위한 소위 치료적 인공임신 중절이 허용되고 있는데 이 또한 큰 설득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낙태수술 자체의 부작용만으로 귀중한 생명을 잃는 여성들이 세계적으로 보면 1년에 23만명(하루에 6백30명)이나 되기 때문이다.
피임하려는 부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동기와 양심과 신앙이지 방법이나 수단은 아닐 것이다. 피임과 낙태가 선택의 문제가 되도록 하여서는 안 된다.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낙태가 손쉽게 이루어지는 사회라고 하여 이 ‘원치 않는 임신’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자. 그러다가 이런 엄청난 일에 대한 죄의식마저 상실하여 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당신은 오장육부를 만들어 주시고 어머니 뱃속에 나를 빚어주셨으니 내가 있다는 놀라움, 하신 일의 놀라움, 이 모든 신비들, 그저 당신께 감사합니다. 당신은 이 몸을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 은밀한 곳에서 내가 만들어질 때 뼈마디 마디 당신께 숨겨진 것 하나도 없었습니다.”(시편 139,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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