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아프리카교회는 치쁘리아누스 주교 이후 40년간 뚜렷한 신학자가 없었으나 3세기 말에 아로노비우스를 맞게 된다.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시까 출신인 아르노비우스는 오랫동안 수사학 교사로 일하면서 그리스도교를 맹렬히 반대하였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 50세 되던 295년경에 꿈속에서 현시를 받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다음에는 열렬한 호교론자가 되었다. 그의 꿈의 내용과 개종 동기를 명확히 알 수 없지만, 그는 개종한 다음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오, 나는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눈 먼 자였던가! 나는 대장장이들이 망치로 두드려 만든 형상들, 코끼리의 뼈들, 그림들, 고목(古木)에 걸려있는 넝마쪽들을 섬겨왔었다. 사실 나는 올리브기름에 절어있는 바위를 쳐다보고는 마치 어떤 신적 능력이 그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깊은 존경심을 드러내곤 하였다. 아무 이성적 요소도 없는 그런 바위에 대고 나는 말을 하고 복을 빌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 신들이 나무나 돌이나 뼈의 조각들에 불과한 이런 물질에 거처하겠는가 하는 의문을 품고 그것들을 불손하게 다루기도 하였다. 위대한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인도에 따라 이제 진리의 길에 들어선 나는 이제 이 모든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다만 그분에게서 기쁜 생활을 영위할 큰 은혜를 받았고 그분께 바람으로써 언젠가는 다가올 ‘그 날’에 희망을 두고 있을 뿐이다”(이교민족들 논박 1,39). 한편 교회는 디오끌레씨아누스 황제의 말기인 303년에 매우 혹독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재난과 질병, 기아와 전쟁 등이 계속되는 까닭은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한 고발에 대항하여 아르노비우스는 그의 걸작인 「이교민족들 논박」을 통해 박해의 부당성과 이교(異敎)의 비합리성을 지적하였다. 그는 평신도로서 후배양성에 헌신하다가 327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다음 호에 소개하게 될 락탄씨우스가 있다.
저서
예로니무스의 「연대기」에 의하면, 아르노비우스가 개종할 뜻을 밝혔을 때 시까의 주교는 그의 과거 행적을 미루어 보아 그에게 분명한 입장표명과 신앙고백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르노비우스는 자신의 신앙을 입증하기 위해 7권으로 된 방대한 「이교민족들 논박」을 저술하였다는 것이다. 이 저서는 호교론적 유형에 속하지만, 그리스도교를 옹호하기 보다는 이교사상을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데에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래서 이 저서는 당시 이교사상을 가장 신랄하게 질타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먼저 아르노비우스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세상의 질병과 재앙이 생겨난다고 무함(誣陷)하는 것은 이교도 사제들에 의한 책동으로써 불황기에 그들의 수입이 감소되었기 때문에 그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전가시키려는 저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예리하게 지적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참된 종교, 참신앙을 가져왔음을 역설하면서 그리스도교에 귀의할 것을 권유한다. 또 그는 여러 형태의 이교를 세밀히 분석하면서 모든 우상숭배는 잘못된 신관(神觀)과 도덕적인 신화(神話)에 의한 것임을 갈파한다. 그렇지만 그는 하느님께 박해자들의 용서를 위한 아름다운 기도를 바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모두를 창조하신 지극히 높으시고 위대하신 하느님, 당신은 피조물들이 볼 수 없고 감지할 수도 없는 분이시니, 찬미받으소서. -이 더러운 입술로 당신을 감히 찬미할 수 있도록 윤허하소서. -자연 안에서 숨 쉬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당신께 마땅히 감사드려야 하며, 당신께 무릎을 꿇고 기도드리고, 삶을 다하여 끊임없이 당신 이름을 부르며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참으로 제1원인(第1原因)이며 시공(時空)의 원천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십니다… 당신은 무한히 위대하고 끝없는 분이시며, 움직임도 조건도 없으신 분이기에, 사멸할 인간의 그 어떤 언어로도 당신을 형언할 수 없나이다. 당신을 깨닫기 위해서는 오로지 침묵이 요청될 뿐입니다. 무모하게 당신을 묘사하려는 그 어떤 속삭임도 피해야 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왕이시여, 당신의 종들을 박해하는 그들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푸소서.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종교를 거부하는 그들을 당신의 각별한 자비로써 용서하소서”(1,31). 그는 하느님을 감지되지 않으며, 접근될 수 없는 분, 이 세상을 완전히 초월하시고 격리된 분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러한 신관은 플라톤적 신관에 상당히 가깝다. 사실 그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포클레스 등 선대의 희랍학자들 뿐만 아니라 바로, 치체로, 루크레씨우스 등 라틴 저술가들을 폭넓게 인용하고 있는 반면, 이상하게도 성서나 교부들의 글은 전혀 인용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그의 저술 태도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으나, 그는 아마도 3세기 말과 4세기 초엽의 사상적 혼란을 고려하여 그리스도교와 이교사상 사이에 조화를 꾀하면서 자연신학적 차원에서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부각시키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그의 저서는 그리스도교적 신학사상으로는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지만, 당시 이교사상을 진단하는데는 소중한 자료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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