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나라 때 천주교와 경교
원나라 때는 천주교와 천주교 신부 그리고 경교와 경교 사제를 모두 야리가온(也里可溫)이라 불렀다. 혹은 천주교와 경교를 십자교(十字敎)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경교 교당을 궁(宮)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원나라 때 천주교 신부와 경교 사제는 조세부역 군복무에서 면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로부터 매달 은봉까지 받았다. 경교의 수사들은 독신생활을 하였는데 그들의 주임무는 황제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으며 그들의 생활비 일체는 국가에서 지급되었다.
13세기 프랑스왕의 사절로 몽고에 들어간 러브럭 신부에 의하면 정종의 주치의 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었다 한다.
경교는 중국에 들어온 지 오래되어 부패하였으므로 경교 신자들이 천주교로 개종을 많이 하고 황제도 천주교를 점차 신임하자 이를 투기하여 경교도들은 천주교에서 성당을 신축 중에 있었는데 밤에 와서 파괴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몬테콜비노 신부를 모략하여 감옥에 투옥되게 하기도 하였다.
■중국에서 천주교 경교 절적(絶跡)
천주교는 몽고 황실로부터 지지를 얻었으나 중국 본토인을 끌어들이지 못하여 원이 망하자 천주교와 경교는 중국땅에서 절적되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중국인 신부를 양성하지 못한데도 그 원인이 있다. 명나라가 발흥하면서 천주교를 배척하여 많은 신자들이 정부의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수도원 성당은 다 파괴되고 다행히 무사한 교우들은 불교 도교로 개종하였다.
■경교의 청동십자항패(靑銅十字項牌)
경교의 유물로는 돈황에서 발견된 8종류의 한문경전과 영성(零星)한 시리아문 경전,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 경교화 철제십자가 묘비(墓碑) 등이 있다. 신강성(新疆省) 이리(利犁)지방에서는 경교 신자의 묘석이 6백여 개나 발견되었다.
-청동십자항패
수원(綬遠) 포두(包頭)일대는 원나라 때 왕고부(汪古部) 극열부(克烈部)가 있던 곳으로 이미 당말(唐末) 오대(五代)때 경교가 전래되어 성행했던 곳이며 13~14세기 경교의 근거지였다. 포두 황하(黃河)지역 분묘(墳墓)에서 청동십자가항패가 많이 출토되었다. 포두 일대에서 발견된 청동십자항패는 약 1천3백여 개가 되는데 그 중에 9백79개는 북경 우체국장이었던 영국인 닉슨(FㆍAㆍNixon)씨가 소장하였다. 필자는 닉슨씨가 소장했었던 청동십자항패 9백79개 전부 확인하였다. 1929년 전에는 경교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어도 아무도 중시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경교의 유물이 프랑스 스웨덴으로 들어가자 서서히 관심을 끌게 되었다.
-십자가에 그리스도상 부착하지 않아
포두(包頭)일대에서 발견된 청동십자항패는 원압식(元押式) 항패(項牌)로 한(漢)이래 동인(銅印)과 방불하다 십자가 모양이 각기 다르며 중복되지 않고 그리스도상을 부착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원나라 때 경도들은 십자가를 집안에도 걸고 건물 밖에도 걸고 관(冠)에도 부착시키고 목에도 걸고 허리에도 차고 다녔다. 혹은 말 나귀 낙타에도 패대(佩帶)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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