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신문사와 한국 가톨릭 문화 선양회가 후원하는 학술 심포지엄, 「안중근의 신앙과 민족운동」이 8월21일(토) 오전 10시30분 가톨릭 교리신학원 강당에서 개최된다. 한국 가톨릭 문화사 연구회(회장=노길명)가 「제100회 한국교회사 연구발표회」를 기념해 마련하는 이번 학술심포지엄은 안의사에 대한 교회와 신자들의 올바른 이해와 가톨릭교회의 민족사적 과제를 인식하게 해줄 귀중한 시간이 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안의사의 생애와 사상, 민족운동과 신앙을 학술적으로 또 교회사적으로 살펴보는 이번 학술 심포지엄 내용을 모든 애독자 여러분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주제별 발표내용을 발췌 소개하고자 한다. 다음은 제1주제로 노길명 교수가 발표하는 「안중근의 가톨릭 신앙」 발표요지이다.
한 개인의 신앙이나 영성은 신학이나 교리에 대한 인지도, 기도 및 수덕생활의 정도, 종교조직체의 활동에 대한 참여도 그리고 자신이 신앙하는 종교의 가치와 이념을 타인에게 전파하고 사회적으로 구현시키고자 하는 투신의 정도 등으로 파악될 수 있다.
안중근이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자신의 종교적 체험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부친의 개종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개종의 동기 또한 당시에 유행하던 양대인자세적(洋大人藉勢的) 동기와 다분히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입교 후에는 철저한 교리학습과 엄격한 수덕생활 그리고 적극적인 전교활동을 통해 자신의 신앙과 영성을 키워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이룩하도록 불리움을 받은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인식을 종교활동과 국권회복운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그는 여러 지역을 대상으로 한 전도강연과 민권수호 투쟁활동을 통해 황해도 지역의 복음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이 지역에서의 폭발적인 교세신장이 가톨릭교회와 지방관청간, 안중근 일가와 지방관리들간 그리고 가톨릭과 개신교간의 갈등을 심화시켜 결국 한국정부와 프랑스정부간의 외교적 마찰로까지 비화된 「해서교안」의 발발을 초래할 정도로 부친과 함께 민족복음화에 적극적으로 투신하였다. 또한 그는 의병 독립전쟁중에도 하루도 빠뜨리지 않을 정도로 기도생활에 철저하였으며,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동료들에게 대세를 베풀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종교활동은 그 자체가 민족운동의 하나였으며 민족운동 또한 가톨릭 신자로서의 신앙과 영성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가톨릭의 신앙과 영성이 그의 민족운동의 원천으로 작용하였다는 사실은 그의 생애에서 클라이막스를 이루고 있는 이토오 히로부미의 제거로부터 순국때까지의 행동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저격이 성공한 후에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가슴에다 십자가를 그은 다음 비로소 「대한만세」를 불렀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자신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토오 히로부미의 제거는 단순한 살인행위가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보위해야 할 군인으로서 독립전쟁중에 행한 전투행위이며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하는 범죄자를 응징하고 세계평화를 이루기 위한 성스러운 과업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 그는 순국 직전 가족들에게 장남을 성직자로 키워달라고 유언하였으며 성직자들에게는 민족복음화를 위한 배전의 노력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에 대한 사형집행이 확정되자 그 날짜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기념일인 성 금요일로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며 최후의 유언에서는 천국에 가서도 국권회복을 위해 힘쓸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안중근의 신앙에는 무인으로서 용맹성과 신앙인으로서의 경건성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선교사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입되던 서구중심주의 내지는 서구문화 우월주의적인 신앙과는 달리 민족주체의식이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의 신앙이 국수주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보편주의적인 세계관과 민족주체의식을 조화시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속이원론에 입각하여 현실의 정치나 사회문제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내세에서의 축복만을 강조하는 선교사들의 신앙과는 다른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는 민족의 수난과 고통을 외면한 채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제도교회의 선교정책을 비판하면서 인간의 영혼과 육신, 현세와 내세 그리고 개인과 사회를 총체적으로 구원코자 하는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와 같은 자신의 신앙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연결시킴으로써 생활화하고 있었다.
안중근의 신앙 특성은 분명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를 앞선 그의 신앙적 삶은 당시의 제도교회와는 상당한 괴리와 갈등을 나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제도교회로부터 여러 차례 통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제도교회 안에서 활동하였으며 교계제도에 순명하는 자세를 나타냈었다.
안중근에 있어서는 전교활동과 민권수호활동을 비롯한 종교적 활동뿐만 아니라 애국계몽운동과 의병 독립전쟁을 포함한 반(反) 침략 민족운동 또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한 평신도 사도직의 실천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는 그의 이토 히로부미 제거행위를 살인행위로 규정하여 그의 생애와 활동은 물론 그의 신앙심과 영성에 관해서도 무관심하여 왔던 것이 사실이다.
최근 교회 일각에서 그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내려졌던 살인자로서의 낙인이 벗겨지지 않는 한, 오늘을 사는 크리스찬들에게 미치는 그의 신앙과 영성의 영향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밤, 안중근의 의병운동을 독립전쟁으로 규정하면서 그의 이토 히로부미 제거를 독립전쟁의 한 전략으로 파악하고 있는 학계의 동향에 비추어, 그에 대한 종교적 평가는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학계에서도 그의 생애와 활동을 보다 정확히 파악하고 조명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 전체에 에너지로 작용하였던 그의 가톨릭 신앙과 영성에 관해서도 보다 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생애와 국권회복운동은 그의 사상적 지주로 작용하였던 가톨릭 신앙과의 관련을 통해서만 그 내용과 의미가 보다 명확히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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