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발표 게재순
① 안중근의 가톨릭 신앙(노길명 교수)
❷ 안중근의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전쟁(조광 교수)
③ 안중근의 동양평화론(홍순호 교수)
④ 안중근의 의거와 교회의 반응(최석우 신부)
애국 계몽운동
안중근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는데 배경이 되는 사실로는 그가 천주교 신자였다는 점과 그 당시에 애국계몽단체에 그가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우선 그는 당시의 천주교회에서 ‘참된 개화와 거짓개화의 구별’을 주장하며 교육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참된 개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러한 당시 교회의 주장이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안중근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안중근은 1906년을 전후하여 서우학회(西友學會·후일 서북학회로 통합개칭)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의 서우학회는 개화 지식을 보급하고 교육과 식산의 진흥을 통해 국권을 수호하려던 결사(結社)였다. 이 서우학회의 취지에 찬동한바 있었으므로 그는 여기에 참여하여 활동했고, 이 학회와 같은 맥락에서 민족주의 계통의 교육운동에 투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교육 구국운동은 대학교 설립에 관한 노력을 통해 먼저 확인된다. 그는 당시 천주교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에게 대학교 설립을 건의했다.
안중근은 실제로 학교를 세워 민족교육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즉 그는 1906년 진남포로 이주한 이후 ‘삼흥학교’를 세워 운영했다. 이 학교는 후일 교명을 ‘오성학교’로 바꾸었지만 안중근은 자신의 삼형제들과 더불어 이 학교를 운영했고, 그의 처남 김능권도 이 학교의 운영에 적극 관여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당시 진남포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다가 경영난에 봉착한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이 돈의학교는 평안남북도와 황해도의 공사립학교 60여개 교의 5천여 명 학생들이 모여서 개최했던 연합대운동회 때 제일위의 성적을 낼 정도로 당시의 대표적 교육기관으로 발전해 갔다.
독립전쟁
한편 안중근은 1907년 국내에서의 애국계몽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국외의 활동에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고자 했다. 이에 그는 1907년 자신의 주된 활동무대였던 평안도를 떠나 원산을 거쳐 간도 지방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원산 성당의 브레(白, Bret)신부를 만났다. 브레 신부는 안중근의 영세신부였던 빌렘 신부로부터 안중근에 관한 소식을 미리 듣고 있었다. 브레 신부는 당시 선교사들이 강조하고 있었던 정교분리 원칙을 안중근이 위배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그에게 성사를 베풀어 주는 것을 거절했다.
이로써 안중근의 독립전쟁 수행은 교회 조직과 공적인 연결을 가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1907년 10월경 간도 지방일대를 돌아보고, 그해 겨울 이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후 이곳을 배경으로 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곳에서 계동청년회에 참가하여 ‘임시사찰’에 선출되었고, 1908년에는 그곳에 거주하는 유력한 한인들을 설득하여 의병 부대의 창설을 주도했다. 그는 이때 엄인섭과 김기룡 등과 의형제를 맺고 독립전쟁에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안중근은 이 과정에서도 천주교도로서의 윤리의식과 신앙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예를 들면 그가 포로의 즉결 처분을 거부한 것은 살인을 금하는 교회의 가르침과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그가 참패를 당한 후 귀환하던 도중 죽음에 임박한 동료 의병에게 대세를 베푼 것도 신도로서의 신앙행위였다. 이로 미루어보면 그의 독립전쟁은 교회조직과 공적 연계는 갖지 않았지만, 그는 신도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이에 참여했다고 할수 있다.
의거
안중근은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이곳에 머물면서 대동공보의 기자 및 대동학교의 학감을 지냈다. 그리고 의병 재기를 기도했으나 여의치 못했다. 그는 1909년 1월 동지 11명과 함께 단지 동맹을 맺고 구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다짐했다. 그는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에 오게 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를 제거하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세웠다.
그는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 등과 함께 이토의 제거를 모의했다. 그리고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은 이토를 제거하게 되었다. 그는 이토의 제거를 기도하면서도 자신의 신앙에 대한 남다른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그는 거사직전에 탄피에 십자표시를 새겨 넣으면서 이토의 제거를 충심으로 기원했다. 또한 그는 이토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십자 성호’를 긋고 대한만세를 불렀다. 또한 그는 체포된 직후 자신의 신분을 말하며 ‘천주교인 안응칠’이라고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로 미루어볼 때 그에 있어서 신앙심과 애국심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맺음말
안중근은 신앙심과 애국심을 조화시킬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교회에서 정교분리를 엄격히 주장하며 신도들의 독립운동마저도 정치운동으로 판단하고 이를 파문으로 금했던 당시의 교회상에 저항했고 그러한 상황으로 부터 피해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신앙심과 애국심의 조화를 통해 개항기 조선교회가 나아가야 했을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안중근은 애국계몽운동과 무장독립운동을 조화시킴으로서 당시 우리나라 역사가 걸어가야 했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고 이를 실천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국권 수호라는 목적을 위해 교육운동 국채보상운동과 같은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했고 무장역량을 키워 직접 독립전쟁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했는데, 그 제거의 열다섯 가지 이유 가운데 세 가지로 이토가 ‘교육을 방해했고, 한국인의 외국 유학을 금했으며,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웠다’는 것을 들고 있다. 이러한 예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그의 무장투쟁은 그의 애국계몽사상과 표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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