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23세와 특히 바오로 6세 교황을 열렬히 존경하면서 그 분의 사상을 닮으려고 노력했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그가 1980년 3월 산살바도르의 한 성당에서 미사 집전도중 군부독재의 사주를 받아 암살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1989년 세계 성체대회를 전후하여 상영된 ‘로메로’라는 영화를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이전에 성바오로 출판사에서 그분의 강론을 편집한 「여러분이 교회」라는 책이 소개된 바 있다.
그런데 이번에 번역 출간된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소리」는 그간의 단편적으로 알려진 그분의 사상을 일관성 있고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68년 메델린에서 열린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채택한 해방을 위한 사목적 선택은 로메로 대주교에게도 커다란 회심의 계기로 다가왔다. 조용한 성품에 겉으로는 보수적이었던 로메로 대주교가 동료사제인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가 암살당하는 사건을 통하여 특별히 민중적 사랑의 희생적 국면에 대한 깊은 영적 체험을 하면서 그가 보여준 예언자적 행위는 그분의 말씀만큼이나 감동적이다.
이 책에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산살바로르 대교구의 교구장으로 부임하던 첫 해부터 연작으로 발표한 네 편의 사목서한을 싣고 있으며, 그가 암살당하던 날 미사강론이 덧붙여졌다. 사목서한은 부활절 서한에서 시작되는데 주로 메델린과 푸에블라 주교회의에서 행한 이 대륙의 상황에 적용하여 재해석 하는데 주어졌다.
여기에 그분의 일관적 정서는 죽음과 부활의 문제였던 것 같다. 그분이 죽던 해까지 10여 년 동안에 9백50여 명의 수도·성직자들이 민중의 편에 서서 일하다 죽음을 당하였다고 하니, 여타의 희생자들을 포함시킨다면 이 당시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서 죽음이란 그리 생소한 주제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결국 로메로 대주교는 이들 억울하고 의로운 죽음의 의미를 어떤 방식으로든 재해석하고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삶에 반영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로메로 대주교는 두 번째 사목서한에서 “교회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자 할 때에는 어김없이 박해를 받는다”는 점을 잊지 말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교회가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모든 환난 중에서도 그리스도교적 용기로 계속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만이 교회는 고통받는 이들 옆에 있다는 신뢰를 확보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박해에 놀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박해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충실성과 고통받고 있는 다수와의 연대에 대한 반동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마찬가지로 그분은 마지막 성찬례를 드리면서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성서말씀과 함께 “인간을 위해 희생 제물로 바쳐진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우리에게 양분이 되고, 우리 또한 우리의 몸과 피를 고통받는 이에게 나누어 주소서”라는 마지막 기도를 바치셨다.
그 분은 당신의 말씀대로 살고 또한 죽었으므로 믿음대로 부활할 것이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 “만일 그들이 나를 죽이면, 나는 엘살바도르 민중 속에서 솟아오를 것이다”라고 평소 하던 말씀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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