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이었다. S대학에 다니는 한 여학생이 학교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고 늦게 귀가하던 중 난데없이 나타난 남자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당시 그 여학생의 옷차림은 짧은 미니스커트와 지금 유행하고 있는 소매 없는 옷이었다.
성폭행을 당한 이 여학생은 용기를 내어 이를 고발하고 사회문제화 시켜 다시는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없도록 하기 위해 여성단체를 찾았지만 성폭력으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해줄 법이 없어 또 한 번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이처럼 성범죄가 우리 사회의 커다란 환부(患部)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만연된 고질병이 되고 있다. 특히 성범죄의 직접적인 피해당사자인 여성을 보호해줄 법적 근거가 없는 실정이고 보면 하루속히 시급한 대책이 마련돼야할 것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성폭행 피해 상담자들은 자신을 강간한 남자를 21년 후 살해한 김부남씨나 성폭행 후유증에 시달리다 투신자살한 30대 여성사건은 한국사회의 성폭행 피해여성들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결같이 말하고 있다.
작년의 세계 경찰기구 통계에 의하면 한국의 강간발생률이 세계 3위로 보고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강간 고소율은 다른 나라(30~40%)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진 2%에 불과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단연 한국은 강간발생률 세계 1위임을 자부(?)할만 하다.
또한 우리나라만 따지더라도 해마다 경찰-검찰에 고발, 보고되는 성범죄는 평균 5천여 건. 그러나 법무부 「범죄백서」에서는 강간사건의 신고율을 2.2%로 추산하고 있어 실제사건은 엄청나게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강간이 유교사회 안에서 교육받은 피해자(여성)들과 사회구조적인 모순 때문에 이렇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가해자(남성)들에게 안전지대가 되면서 죄의식조차 못 느끼게 만들고 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서구의 성개방화 물결이 밀려들면서 영화나 음란비디오 만화 등 퇴폐문화를 쉽게 접하게 된 청소년들이 죄의식 없이 성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법무부의 「범죄백서」에 의하면 강간범중 34.9%가 19세 이하로, 이들은 “비디오나 잡지에서 본 남녀관계의 장면이 눈앞에 어른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어 퇴폐문화가 강간을 포함 성범죄를 부추기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최근의 성범죄는 단독범에서 집단 성폭력으로, 피해자도 모르는 사람에서 아는 사람으로(70%) 옮겨지는 추세여서 더욱 그 방법이 잔인해지고 있음이 증명되고 있다.
지난 4월 문을 연 한국 성폭력상담소(소장 최영애)에 들어온 성폭력 상담사례는 5개월 동안 7백여 건에 이른다. 이 중 직장상사나 동료에 의한 강간이 30%, 어린이 성폭력이 15%를 차지해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성폭행이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문화적 분위기에서 특히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게 일반적 견해지만 한국의 경우는 오랜 군사독재로부터 뿌리내린 폭력정치, 문화가 가해자들의 무의식속에 깊게 각인돼 있는 것이 그 주된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가톨릭대학 총장 최창무 신부는 성폭력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르는 것에 대해 “생명과 인간존엄성을 경시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어쩌면 성폭력은 당연한 현상일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성폭력을 근본적으로 추방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적인 측면에서 생명을 존중하는 보다 강력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이처럼 성폭력이 늘어나면서 성폭력 방지운동이 한국 여성계의 주요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지난 87년 23개 여성단체들이 모여 출범한 한국 여성단체 연합회를 중심으로 펼쳐온 ‘성폭력 특별법’ 제정운동이 이번 임시국회에서 논란이 됐고, 다음 정기국회 때 어떤 방식으로든 법제화될 것으로 보여 그동안 여성운동의 한 결과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번 임시국회 때 민자당에서 내놓은 시안을 보면 성폭력 특별법에서 가장 중점사항으로 떠오른 ‘최고죄’(親告罪)를 비롯 여성단체들이 주장하고 있는 ‘비동의 간음죄’ ‘혐오혐의’ 등이 빠져있어 성폭력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법제정 운동이 그렇게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어서 이에 대한 여성단체들의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되고 있다.
성폭력 방지가 이렇게 여성계의 중심 사업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폭력을 일으키는 가해자들의 각성과 생명에 대한 올바른 의식이 앞서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강간을 포함, 성폭력 발생률이 전 세계에서 1등인 국민, 그래서 전철에도 ‘여성 전용칸’이란 금남칸이 만들어져 있는 사회에서 사는 우리들이 ‘문민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도 “더 이상 성폭력 문제가 여성계만의 운동으로 방치되어서는 안 되고 전 사회가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과제로 인식해야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의견이다.
빼앗긴 밤길을 여성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짓밟힌 여성의 인권과 성폭력으로 인한 가정파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법제정과 함께 온 국민의 의식전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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