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띠누스의 밀라노 포고령(布告令)
3백년간 박해를 받아오던 그리스도교는 콘스탄띠누스(280~337년) 황제가 313년 밀라노에서 반포한 포고령에 의해 종교해방을 얻게 되었다. 이 포고령은 단순히 교회가 더 이상 박해를 받지 않게 되었다는 차원을 넘어 교회가 인정받은 교회로 그리고 후에 로마제국의 국교(392년)가 되면서 여러 방면에서 놀라운 발전을 하게 되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종교해방을 얻게 된 과정이 흥미롭다. 콘스탄띠누스는 280년경 아버지 콘스탄씨우스 클로루스와 어머니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의 로마황제는 디오끌레씨아누스였는데 제국이 워낙 광대했기 때문에 황제 자신은 니꼬데미아에 머물면서 동쪽 지방은 갈레리우스가 서쪽지방은 콘스탄띠누스의 아버지인 콘스탄씨우스가 통치하게 하였다. 디오끌레씨아누스 황제는 305년 1월 5일 퇴위하면서 예상과는 달리 갈레리우스를 제1 정제(正帝)로, 콘스탄씨우스를 제2 정제로 선포하였다. 이듬해인 306년 7월 25일 콘스탄씨우스가 사망하자 그의 군인들은 아들 콘스탄띠누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나갔다. 312년 봄 갈레리우스가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어 막센씨우스가 집권하자 콘스탄띠누스는 군대를 몰아 로마로 진격해 왔고, 10월28일 로마 근교에 있는 ‘밀비오 다리’에서 막쎈시우스와 마지막 결전을 겨루게 되었다. 그는 결전을 앞두고 하느님께 기도하였는데 꿈속에서 하늘에 십자가가 나타나고 “너는 이 표시로 승리하리라(hoc signo vinceris)”는 환시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군인들의 방패에 십자표시를 그려넣게 한 다음 전투를 하였더니 대승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로마의 꼴로세움 바로 옆에는 콘스탄띠누스의 아름다운 개선문이 있는데 거기에 이 역사적인 사실이 부조되어 있다. 그는 이듬해인 313년 밀라노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금하는 포고령을 발표하였다. 콘스탄띠누스의 포고령이 종교의 자유를 준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박해로 억제될 수 없을 만큼 많아졌기 때문에 통치자들이 그리스도교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한편 콘스탄띠누스의 어머니는 골고타에 있는 3개의 십자가 중에 예수님이 못박히셨던 십자가를 기적적으로 찾아낸 성녀 헬레나이며, 예수님의 십자가에 부착되어 있던 명패(INRI 유다인의 왕 나자렛사람 예수)는 로마에 있는 ‘예루살렘 십자가 성당’에 아직까지 모셔져 있다.
종교해방 후의 교회발전
‘불법적인 종교’ ‘지하교회’ 또는 ‘까다꼼바 교회’로 특징져지던 그리스도교는 콘스탄띠누스의 포고령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의 보호와 특권을 누리게 되면서 4~5세기에 황금기를 맞게 된다. 교회는 대중의 대량 입교로 인해 양적으로 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수많은 교부들을 배출하였다. 사실 교부학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교부들은 대부분 이 시대에 속한다. 교회의 주교들은 당시의 최고의 지성인들이었으며, 온갖 형태의 이교사상과 반(反) 그리스도교적 사상을 거슬러 교회의 교리를 정립시켜 나갔다. 교회의 신학발전은 4대 공의회 즉 니체아 공의회(325년), 콘스탄티노 폴리스 공의회(381년), 에페소 공의회(431년), 칼체돈 공의회(451년)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신학자들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성서를 연구하고 다양한 신학사상을 개진하는 가운데, 특히 성삼론이나 그리스도론 같이 미묘하고 어려운 문제에 있어서는 이단적인 상상들이 나올 수도 있었다.
이러한 이단들에 대한 논쟁을 통해 신학이 발전되었으며, 공의회들을 통해 정통교리가 확정, 공포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시대에는 교회에 부정적인 요소들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교가 누리게 된 영광과 특권을 메시아적 승리의 관점에서 이해하는가 하면, 교회가 국가권력과 너무 밀착되어 부(富)와 권력을 누리면서 세속화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대중의 입교로 인해 완화된 세례준비와 입교절차 때문에 신자들의 신앙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상에 대응하여 교회의 복음화와 내적 쇄신 그리고 신앙의 심화를 위해 수도생활 운동이 도처에서 나타났다. 수도자들은 교회의 타락과 세속화를 막아주는 소금의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해시대의 순교영성을 대신하여 교회를 강화시키고 쇄신하는 힘이 되었다. 사실 당시의 유명한 교부들 중에는 성 바실리우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우스, 성 아우구스띠누스 등 수도자 출신 주교들이 많았다.
한편 서방교회는 라틴어를, 동방교회는 희랍어를 통용어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서방교회 사이의 신학적 교류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서방교회는 동방교회의 많은 희랍어 문헌들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은 예로니무스와 루피누스이다. 그들은 동방교회의 신학을 서방에 소개하는 데에 공헌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번역한 문헌들 중에는 후에 희랍어 원문이 상실되고 라틴어 번역만 남아있는 경우들이 많아 귀중한 역사적 문헌들을 후대에 전해주는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도 그 공로를 높이 평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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