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로 서품된 후 첫 미사 때 신자들에게 선물하는 상본은 사제들의 출사표와 같다.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서 오랜 시간을 수련하는 신학생들은 ‘첫 미사 상본’을 만들며 설레기도 하지만 대부분 진지해지기 마련이다.
그만큼 첫 상본은 평생 자신이 선택한 성구와 같이 거룩한 사제의 길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겠다는 각오이기에 상본은 사제들에게 큰 의미가 된다.
이 상본이 시대를 거듭하면서 상본에 이용된 성화와 성구가 바뀌고 있다. 사제로 서품되는 그 시대의 시대상을 반영이라도 하듯 상본은 시대별로 특성을 갖는다.
60년대 서품을 받은 서울 둔촌동본당 김수길 신부는 “상본을 만들 때 고민을 많이 했지만 대부분이 예수님이나 성모님 성화를 주로 썼다”고 설명하면서 “성구 역시 복음서에 나타난 구절이 가장 많았다”고 밝힌다. 김 신부는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치거라’를 선택했다고 한다.
이처럼 60년대 신부들의 첫 상본에는 주로 추상적인 복음구절이 인용됐고, 예수님이나 성모님의 성화, 성작 그림 등이 주로 상본용으로 애용됐다.
이러한 상본이 70년대와 80년대를 거처 조금씩 변하고 있다. 이는 이 기간 동안 군사독재로 인한 민주화 운동 등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성화에 고난받는 예수의 모습을 판화로 새겨 넣거나, 이사야서와 같은 예언서의 성구가 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기다.
일반적으로 사제들의 첫 상본에 사용되는 성구는 구체적이기보다는 추상적인 구절이 많다. 왜냐하면 사제들이 실제로 교구로부터 사제로 서품된다는 확정을 받고 서품준비를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고, 구체적인 성구로 선택했을 때 사제가 된 후 이것이 오히려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이유다.
또 이 같은 이유는 신학교 교육이 구조적으로 학생들이 성소에 대해 확신을 갖고 사제직을 준비하기보다는 소위 쫓겨나지 않을까 하는 ‘똘레(Tolle)공포증’으로 인한 소신 부족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80년대 신품을 받은 한 신부는 풀이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서울 화곡본동본당 전종훈(시몬) 신부는 “상본은 사제의 얼굴만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전제한 후 “그러나 진정으로 상본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신학생들 스스로가 소신을 갖고 사제직을 준비할 수 있게끔 하는 신학교 교육이 뒷받침돼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사제들의 첫 상본은 더욱 다양화되며, 개성화되기도 해 더욱 흥미롭다. 자신의 묵상하는 장면을 상본그림으로 하는가 하면, 직접 자신이 그림을 그려 꾸미는 개성파 사제도 등장했다.
올 7월에 새로 서품된 서울교구 새신부들의 상본에도 역시 다양한 모양의 성화와 성구가 등장한다. 예수님의 모습부터 산동네 사람들의 애환을 담은 판화까지 다양하고 가지각색의 상본을 선보였다.
문민정부의 출범과 사회 전체적인 면에서 80년대와는 상대적으로 안정을 되찾고 있는 사회분위기와 개인을 중시하는 사회풍토가 이들 새사제들에게도 영향을 끼치는 것 같은 분위기다.
사제들의 첫 상본은 한 사제가 평생을 두고 쌓아갈 십자가의 길을 집약적으로 표상화한 것이다. 서품식날 사제들은 제단위에 온몸으로 엎드려 자신이 앞으로 살아갈 험난한 길에 모든 성인이 함께하길 간절히 빈다. 첫 미사 때 많은 신자들에게 자신의 출사표(상본)를 선물하며 사제는 신자들과 ‘이렇게 살겠습니다’고 약속한다. 사제의 첫 상본은 바로 그 사제의 삶의 지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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