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아도 보초 경계를 게을리 한 지휘관은 용서받지 못한다”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실수라도 작전의 실패와 보초 경계의 태만은 차이가 큽니다. 작전의 실패는 최선을 다하다가 실패한 것이지만 보초 경계의 태만은 그 자체가 이적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보초에게는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 한 사람에 의해서 전체가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보초는 항시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며 위험이 있을 시에는 사람들에게 알려서 재난을 피해야 합니다. 일찍 알렸는데도 그에 대응치 못해서 사람들이 다치면 그것은 그 사람들 잘못이지만 알리질 못해서 사고를 만났다면 그것은 순전히 보초 책임입니다.
예언자는 시대의 보초입니다. 위험이 있을 때 그는 두려움 없이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오늘 1독서(에제 33,7-9)에서는 에제키엘이 하느님의 보초로서 소임 받은 내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예언자들은 그 고달픈 직무 때문에 왕과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아 참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보초의 임무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박정희 대통령시절에 ‘유신만이 살 길이다’라는 구호가 있었습니다. 그때 정부주도하의 언론 매체 때문에 대다수 국민들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국민투표에서도 거의 백% 가까운 지지표를 받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 교회의 주교님과 몇몇 신부님들이 정부 정책의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유신철폐’를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실로 대단한 도전이었으며 사리를 분간하지 못하는 무모한 행위로까지 보였습니다.
많은 천주교 신자들까지도 그때의 주교님과 신부님들을 공격하고 비난했습니다. 정부가 어련히 잘 하고 있는데 왜 교회가 정치에 간섭하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대한 나쁜 여론이 빗발치듯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주교님 한 분과 신부님들 몇 분이 투옥되었으며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야 우리는 그분들이 옳았으며 백성은 유신에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수는 우둔합니다. 한마디로 군중은 어리석습니다. 앞에서 누가 얼굴을 가리고 거짓말을 하면 그것이 옳은 줄 압니다. 그래서 전체가 잘못된 길을 옳은 길인 줄 알고 착각 속에 걸어갑니다. 따라서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충고를 받아들이는 아량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보초의 말을 듣지 않고 충고를 외면하면 그는 망합니다. 혼자만 망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도 망치고 백성도 망칩니다. 그러나 충고를 듣는 것도 어렵지만 충고를 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유럽에서 어떤 왕이 낮잠을 자는데 왕궁 뒤에 있는 방앗간의 풍차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이루자 짜증이 생겼습니다. 화가 난 왕은 신하를 시켜 풍차를 부숴버리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신하들이 달려가서 그 풍차를 부숴버리자 방앗간 주인이 나와서 “왕은 백성의 아버지인데 자녀들이 생업에 힘쓰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한 몸의 평안을 위해 재산을 부숴버리다니 이 나라의 장래가 걱정된다”며 한탄했습니다. 신하들이 이 말을 왕에게 전하자 왕은 방앗간 주인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고 풍차를 다시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왕이 바로 프로이센의 프레데릭 대왕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충고의 말씀을 들려주시면서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잘못은 있을 수 있고 실수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에게 충고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사실 자기 자신을 잘 바라보지 못합니다. 자신보다는 옆에서 더 잘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충고를 받을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큰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솔직한 충고를 해줄 수 있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래야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에겐 모두 보초의 임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잘못은 지적하고 고쳐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남이 잘못되고 있는데도 충고하지 않고 바로 잡아주지 않는다면 그는 공범잡니다. 불이익을 당한다 해도 틀린 것은 지적하고 고쳐줄 때 그가 참 신앙인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훌륭한 보초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남의 말을 잘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자존심이 상하고 체면이 손상된다 해도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 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로마 13,8)
이 사랑이 바로 보초의 의무가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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