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孫子兵法)에 ‘허허실실의 전법(虛虛實實의 戰法)’이란 것이 있다.
아군이 아무리 우세하고 적군이 독안에 든 쥐라 할지라도, 성(城)의 사대문(四大門)을 동시에 다포위를 하면 적군은 그야말로 이판사판, 필사의 결전을 하게 되어 평소의 3배가량의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3대문은 포위하되 한 대문만은 허술하게 방비를 해서 적이 도망치도록 만들어놓고 도망치는 적을 추격해서 단숨에 무찔러버리라는 것이다. 이 이치는 가장 허술한 듯하면서 가장 내실(內實)을 기하는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비단 전쟁 뿐 아니라 평소 우리 생활에 이 이치가 그대로 적용한다. 귀한 물건(보석 같은 것)일수록 허술한 데다 감추어야지 도적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도적은 필시 장롱 깊숙이 보석함 같은 것을 뒤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영악하고 빈틈없는 사람보다 다소 어수룩한 데가 있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너무 똑똑하고 완벽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경계하고 피하는 경향이 있다. 덜 똑똑하더라도 덕망이 있고 넉넉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잘 따른다.
완벽하게 정돈되고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정갈하게 청소가 된 집에 들어설 때는 조심스럽고, 약간 어질러져 있는 집에 들어설 때 마음이 편안하다.
요즈음 같은 과학시대에는 매사에 정확을 기하고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다보니 매우 타산적이고 빡빡하며 한 치의 여유도 없어 보인다. 때로는 숨을 쉴 수도 없다는 느낌이 든다. 기계는 정확할수록 좋지만 사람은 기계가 아니므로 여유 있고 낙낙한 것이 좋다. 자식들이 점수(성적) 따오는 것만 가지고 웃었다 울었다 하며, 마치 자로 재듯이 평가하지 말자. 아이들은 전인적(全人的)인 인격체이지 기계가 아니다. 사람과 기계는 구별되어야 한다.
스승이 제자를 꾸지람 할 때나 부모가 자식을 야단칠 때나 상사가 부하를 나무랄 때도 변명할 여지를 주면서, 도망칠 구석을 남겨두고 하는 것이 좋다.
여지없이 몰아붙이면 반발하거나 반항을 해서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는 수가 많다.
그림에도 여백의 미라는 것이 있듯이 사람도 여백의 미가 필요한 것 같다.
여백의 미가 많기로야 우리 민족을 따라갈 사람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수난을 겪었고 전쟁을 치렀어도 늘 노래 부르고 춤추기를 좋아하였다. 이러한 낙천성이 바로 여백의 미에서 근원하는 것 같다.
우리는 각박하고 영악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순박하고 넉넉한 사람을 좋아한다.
복잡하고 화려한 중국 도자기를 들여다보면 머리가 복잡해지고 아파온다.
그러나 우리의 고려청자나 이조백자를 들여다 볼 때는 머리가 맑아지고 조용해진다.
우리는 일본 도자기가 너무 매끈하고 기생처럼 예뻐서 덜 좋아한다. 순수하고 소박하며 단아한 우리의 그것이 더 좋아 보인다. 우리 민족의 다소 허술한 듯한 여백의 미가 이러한 문화유산에 여지없이 표현된 것이 아니겠는가.
조선조 초기의 유명한 정승 황희에 관한 일화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A라는 하인이 황의정승에게 와서 하는 말이 “B라는 하인은 대단히 신의가 없고 불충합니다”고 하였다. 그랬더니 황희는 “음, 그래 네 말이 옳다!”고 대답하였다. 그 소문을 듣고 분해서 달려온 B라는 하인은, “A라는 하인이 거짓말 잘하고 불충하기 짝이 없는 놈”이라고 고해바쳤다. 황희는 “음, 그래 네말이 옳다!”고 대답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C라는 하인이 달려와서 “대감마님! 어찌하여 저 나쁜 두 놈을 혼내주시지 않고 그냥 돌려보내십니까?”하고 고해바쳤다. 이번에도 황의는 “음, 그래 네 말이 옳다!”고 똑같은 대답을 하였다. 그 후로는 하인들이 서로 모함하거나 시기하는 일이 없이 저절로 집안이 조용하게 잘 다스려졌다고 한다. 이 황희정승의 다스리는 법은 ‘허허실실의 전법’의 극치라고 하겠다.
황희정승은 너무나 청빈하여 도포가 한 벌밖에 없었다. 그 부인이 조금 모자라는 사람이라, 도포고름이 한쪽은 올라가 달리고 한쪽은 내려가 달려서 앞섶이 바로 아물려지지가 않는데도 태연하게 등청을 하고 정사(政事)를 잘 보았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일로 하여 한 번도 그 부인을 나무란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지극히 관대하고 마음이 넓은 사람, 다시 말하면 ‘여백의 미’가 많은 사람으로 대표적인 사람이라 하겠다.
가장 허술하게 일을 처리하는 듯 하면서 가장 내실(內實)을 기한 한 예라 하겠다.
황희정승의 지혜와 도량이 대체로 이 정도였다. 이것이 바로 ‘한국인의 지혜’의 표본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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