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열매를 세속의 눈으로만 본다면 참으로 ‘요지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생을 형편없이 개판으로 살았던 자들이 하느님의 칭찬을 받아 천당에 일찍 들어가는가 하면 열심하고 경건하게 살았던 자들은 주님의 호된 꾸지람을 받아 천당문 밖에서 방황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주님 말씀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마태 21,31)
이게 얼마나 큰 모순이요 충격적인 발언입니까? 유태인들로부터 존경받는 대사제와 원로들이 도대체 창녀들만 못하며 도둑이나 세리만도 못합니다. 우리는 그래서 오늘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어떤 부부가 서로 다툰 뒤에 저를 찾아와서 상담한 일이 있는데 얘기를 듣고 보니 아주 가관이었습니다. 남자의 얘기를 들으면 여자가 나쁩니다. 남자 자신에겐 흠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얘길 들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남자가 나빠도 보통 나쁜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자에겐 잘못이 없습니다. 그런데 서로에겐 흠이나 잘못이 없는데 왜 늘 서로 싸워야 하는 모순 속에서 몸부림쳐야 하느냐? 문제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남의 잘못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잘못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불행의 원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왜 유대교에서 존경받는 대사제와 원로들이 창녀나 도둑만도 못하다는 꾸지람을 하시느냐? 아주 뻔한 것입니다. 도둑이나 창녀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주님께 매달릴 줄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대사제와 원로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행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천당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남은 잘 알고 있지만 자기 자신은 모르고 있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불행도 없습니다. 성서에 보면 분명히 그렇습니다. 자기 죄를 알고 있다는 것은 이미 천당에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이요, 자기 죄를 모르고 있다면 그는 여전히 천당에서 멀리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또 얼마나 큰 죄를 졌느냐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인정하고 고백하면 됩니다.
십자가 옆의 강도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매달려 자비를 빌었을때 그는 이미 낙원을 약속받았습니다(루카 23,39-43참조). 도둑이었던 세리도 자신이 부정직하고 욕심이 많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했을때 그는 이미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은 자신의 공로는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믿음이 없고 사랑이 부족하며 용서가 없었고 그리고 이웃을 너무도 무시했던 자신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불행했습니다(루카 18,9-14참조).
옛날 어떤 임금이 교도소를 순시하게 되었는데 그때 모든 죄수들이 임금에게 자신들은 아무 죄도 없는데 억울하게 들어왔다고 하소연을 하더랍니다. 그때 임금은 그러냐고 하면서 그들을 동정해 주었는데 마지막 한 사람만은 아무 말도 못하고 훌쩍 훌쩍 울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사연을 들어보니 자기는 죄가 많아서 임금님 앞에 머리를 들 수 없는 처지라고 한탄하더랍니다. 이때 왕이 신하들에게 그랬답니다. 이곳은 죄 없는 사람들이 들어오는 곳인데 왜 죄인을 이곳에 들여보냈느냐고. 그래서 그 죄인은 그 날로 석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 흔한 말로 ‘주제파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주제파악이 안되면 아주 피곤합니다. 구제불능입니다. 하느님은 무슨 잘못이나 다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주제파악이 안 되는 죄만은 용서가 안 됩니다. 용서를 하시고 싶어도 계속 감추고 숨기고 있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합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창녀만도 못하고 도둑만도 못한 인생일수도 있습니다. 지난번 공직자들의 재산공개를 보면서 그리고 끝없는 거짓말과 변명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일수록 숨기고 감추는 추태가 더 심했습니다. 못난 사람은 감출것도 없고 숨길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코딱지만한 잘못이 있으면 가슴을 치며 두려워합니다.
신앙은 어찌 보면 어리석은 삶입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는 말씀은 깊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는 거짓이 없습니다. 따라서 남의 허물을 보기에 앞서서 자신의 잘못을 바로 보도록 합시다. 이것이 잘살고 잘 믿는 길입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