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1주년] 수원교구 평협이 걸어온 길
주체적이고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발돋움한 반세기
초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 제안으로 결성
1969년 3월 본당·단체 대표 55명 모여 창립
평신도교육계획 세워 지도자 양성에 힘써
생명·환경 등 다양한 사회복음화 활동 참여
한국교회 평신도 희년이 마무리를 향해가는 가운데, 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이하 교구 평협)는 설립 50주년을 앞두고 있다. 교구 평신도사도직의 주축이 되는 핵심조직인 교구 평협은 50년 동안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가톨릭신문 수원교구 창간 11주년을 맞아 교구 평협의 역사를 돌아본다.
교구 평협 주최 제1차 본당 전교부장 교육(1979.8.30~9.1)
■ 설립 배경
교구 평협은 평신도사도직을 바라는 교구의 뜻과 함께 설립되고 발전했다.
초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는 당대 주교 중에서도 평신도사도직 운동에 이해가 높고 관심이 많은 교구장 중 한 명이었다. 윤 대주교는 주교 서품 이전인 1957년 로마에서 열린 제2차 세계평신도대회에 참가했고, 1963년 교구장 취임 후에는 주교단의 일원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도 참석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평신도사도직의 중요성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윤 대주교는 평신도사도직이 강조되는 세계교회의 새로운 흐름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 대주교는 1968년 제1회 평신도의 날에 교구 모든 본당에서 신부들이 공의회 이후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한 평신도사도직에 대해 특별 강론을 실시하도록 당부했다. 동시에 교구 평협 지도신부를 임명해 평협 결성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윤 주교가 평협을 결성하기로 방침을 세운 것은 평협 조직을 통해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이를 통해 교구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교구는 설정된 지 만 6년도 안 된 신생교구로서 인적 자원과 재정자립도가 모두 취약하고, 관할 지역의 태반이 농촌인 이른바 ‘농촌교구’였다. 이에 교구 내에는 평신도사도직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황이었다.
윤 대주교는 1969년 2월 교구 평협 결성을 당부하는 공문에서 “협의회의 구성이 이상적으로 되려면 먼저 본당단위의 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구성되고, 그 다음으로 교구단위로 그리고 전국단위로 발전돼 나아가야 할 것”이라면서도 “현 단계에서 볼 때에는 평신도사도직이 우선 계몽적인 노력에 중점을 두어야 하겠고, 또 이런 교육을 위해서는 아무래도 교구단위나 전국단위 조직에서 준비를 하고 지도를 해주어야 하겠기에 우선은 하향식의 조직과정을 밟는 것”이라고 밝혔다. 교구 내에 평신도사도직이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만큼, 먼저 교구 평협을 설립해 신자들이 평신도사도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양성해나가겠다는 취지다.
1969년 3월 23일 교구 내 27개 본당 대표들과 교구단위 단체 대표 등 55명이 참석해 교구 평협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회의 진행을 참관한 윤 대주교가 회칙과 회장단(회장 조성지, 지도 한종훈 신부)을 인준함으로써 교구 평협이 탄생하게 됐다.
제8차 교구 평협 정기총회(1982.3.7)
■ 평신도 양성의 주축
교구 평협은 윤 대주교가 평협을 설립한 뜻에 발맞춰 평신도 양성을 위한 교육에 힘썼다.
교구 평협은 설립 초기부터 교구 내에 꾸르실료운동을 도입하는 한편 평신도 지도자들을 위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교육, 성직자·수도자·평신도 합동세미나, 본당 운영위원을 위한 교리강좌 등을 실시해왔다.
특히 1972년부터 3개년에 걸쳐 평신도교육계획을 세우고 교구 내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25차례의 지도자 교육을 실시했다. 교육은 단순히 교구 평협이 30여 개 본당 1000여 명의 평신도지도자를 양성한 것에 그치지 않고, 당시 교구장 윤공희 대주교의 사목방침에 함께하면서 교구 전체에 교육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교구 평협사」는 이런 교구 평협의 교육활동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평신도 재교육의 필요성이 제기되고는 있었으나 타 교구에서 미처 적극적으로 이를 시행하지 못하던 시기”였다면서 “교구에서 장시간의 교육을 실시한 일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던 교구 평협은 1973년 8월 활동을 중단했다. 윤 대주교는 평협 활동 중지 이유에 관해 “지금까지의 평협은 계몽적인 교육 알선을 위해 하향식으로 조직됐고,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했다”면서 “상향식으로 재조직해야 하므로 교구 평협의 모든 활동을 중단시킨다”고 이유를 밝혔다.
교구 평협이 활동을 재개한 것은 1977년이다. 당시 교구장 김남수 주교는 제5차 총회를 겸한 재결성 총회의 격려사를 통해 “평협 재조직을 오래 전부터 구상해 왔다”면서 “교육이 조직을 선행해야 한다고 판단해 그동안 9차에 걸친 꾸르실료를 통해 기초작업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 시복시성운동 앞장
활동을 다시 시작한 교구 평협의 활동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시복시성운동이다. 교구 평협은 이미 설립 초기부터 교구 순교복자현양대회를 주관하는 등 순교자현양에 앞장서온 바 있다.
교구 평협은 전국 평협이 주관하는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운동에 동참하는 한편, 교구 시복시성 추진사업과 200주년 기념사업의 일원으로 적극 동참했다.
또 교구 평협은 성지의 순교자 현양행사와 성지순례를 통해 교구 내 시복시성운동의 물결이 일 수 있도록 도왔다.
교구 평협은 1965년부터 해마다 열려온 미리내 순교자현양대회에 적극 협조했다. 특히 1978년 미리내 순교자현양대회 중에는 각 교구에서 모인 1만 여 명 신자들 앞에서 평신도 강론을 진행하기도 했다. 1981년부터 진행된 천진암성지의 ‘한국천주교회 창립기념일 경축행사’에도 행사 때마다 수천 명 신자가 참가할 수 있도록 협조했다.
1979년부터는 교구 내 각 본당과 협력해 버스 10대가 움직이는 대규모 성지순례를 추진했다. 또한 ‘시성을 위한 기도문’ 10만 장을 각 본당에 배포하기도 했다.
■ 사회복음화와 민족 통일을 위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사도적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을 통해 평신도 단체들이 “여러 집단과 여러 생활환경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키는 사도직 목적을 따르고 그 목적에 참여해야 한다”면서 “교회의 사회교리에 따라 인간의 전인적 존엄성에 봉사할 것”을 가르친다. 교구 평협 역시 이런 사회복음화 활동에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교구 평협은 1991년부터 생명공동체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교구 평협은 본당 신자 1000명을 대상으로 합성세제 사용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생명공동체 스티커를 제작, 배포했다. 1992년부터는 낙태방지 캠페인을 펼치고, 낙태방지와 환경보전을 위한 교육 자료를 발간하면서, 생명문화 확산을 위한 교육과 행사를 이어나갔다.
교구 평협은 1992년과 1999년 정치인 의식조사를 실시하고 교구 관할지역 내 국회의원 현황자료를 제작하는 등 신자들이 교회 정신에 입각한 정치인을 판단할 수 있도록 했다. 또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는 ‘지방선거 공명선거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다.
IMF외환위기로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던 1998년에는 아나바다운동을 전개했다. 1998년 9월에는 ‘사랑과 나눔의 아나바다물 큰 장터’를 열어 실직가정돕기기금을 조성하는 한편 건전한 소비문화를 정착시키고자 노력했다.
대사회적인 입장표명에도 나섰다. 1992년 천진암 성지개발에 관해 한 일간지가 허위보도를 작성하자 교구 평협이 성명을 발표하고 적극 대응했다. 이에 해당 언론사가 잘못된 보도임을 시인하고 정정기사를 게재했다. 2008년에는 미리내 성지 인근인 미산골프장 건립반대운동을 진행하고 관련 자료를 주보를 통해 교구민들에게 제공하기도 했다.
교구 평협이 전개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서명운동(1987.5)
순교자 현양대회 봉사하는 교구 평협 임원들(1987.9.27)
여성신자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생명공동체운동에 관한 교육(1992.10.18)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