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종교와 신념에 따라 군입대를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더 이상 형사처벌을 받지 않고 대체복무로 군복무를 대신할 수 있는 길이 더 크게 열렸다.
대법원은 11월 1일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대법관 9(무죄) 대 4(유죄) 의견으로 종교와 신념에 근거해 병역을 거부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그동안 1심과 항소심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무죄와 유죄 판결이 엇갈려 온 상황에서 대법원은 판례 변경을 위한 전원합의체를 구성해 이날 양심적 병역거부를 병역을 이행하지 않을 정당한 사유로 인정하는 역사적 판결을 내놓았다.
현행 병역법 제88조 1항(입영의 기피)은 현역 입영 통지를 받은 사람이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일로부터 3일이 지나도 입영하지 않는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에 의해 양심적 병역거부자임을 주장해도 일률적으로 1년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년6개월을 복역하면 병역의무는 면제받지만 형 집행 종료일로부터 5년 동안 일부 자격시험을 볼 수 없는 등 사회생활에 불이익을 받는다.
대법원은 이번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무죄 판결 이유에 대해 “자유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운영되지만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포용을 인정해야만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며 “국민 다수의 동의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존재를 국가가 언제까지나 외면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전제했다. 이어 “어떠한 제재라도 감수하고 병역의무 이행을 거부하고 있는 이들에게 형사처벌을 통해 집총과 군사훈련을 수반하는 병역의무 이행을 강제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에 대한 과도한 제한이 되거나 양심의 자유의 본질적 내용에 대한 위협이 된다”고 판시했다.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성인 남성 모두에게 의무적인 병역의무를 부과하는 징병제가 도입된 1950년경부터 현재까지 2만여 명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이유로 형사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이유로 재판을 받고 있는 200여 명은 무죄 판결을 받게 된다. 또한 이미 1년6개월의 징역형이 확정돼 현재 수감 중인 70여 명에 대해서도 대통령이 특별사면을 시행해 석방하고 남은 형기는 대체복무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지난 6월 28일 양심적 병역거부와 관련한 헌법소원 및 위헌법률심판 사건에서 대체복무를 규정하지 않은 병역법 제5조 1항을 헌법에 합치하지 않는다고 결정한 데 이어 대법원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병역을 이행하지 않을 정당한 사유로 인정하면서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제 도입이 더욱 빨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가톨릭대학교 교수 박정우 신부(전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총무)는 이번 대법원 판결에 대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사목헌장」과 가톨릭사회교리는 인간의 존엄성 측면에서 자신의 양심에 반대되는 행위를 강요받지 않을 권리를 서술하고 있다”며 “군대에서 살상 훈련을 거부하는 것도 인간에게 주어진 보편적 권리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미 노무현 정부 때 양심적 병역거부를 법적으로 인정하려 했지만 지금에야 대법원 판결이 나와 늦은 감이 있다”고 밝혔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