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산티아고 도보순례 동행 취재기 (상) 뻬레그리노가 되다
길 위에서 깨달았네, 모든 것이 그분께 달려있음을
대전교구 70주년·평신도희년
산티아고 100㎞ 도보 순례
하느님 안에서 나를 돌아보며
절제와 겸손 배우며 걷는 길
10월 26일 스페인 사리아에서 포르토마린까지의 구간을 걷고 있는 대전가톨릭평화방송 산티아고 도보순례 참가자들.
‘뻬레그리노’(Peregrino). 1189년 알렉산더 3세 교황(재위 1159~1181)이 ‘예루살렘’, ‘로마’와 함께 성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있는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이하 산티아고)를 성스러운 도시로 선포하면서 수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기 위해 걸었다. 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Route of Santiago de Compostela, 일명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이하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여기를 걷는 이들은 ‘뻬레그리노’로 불렸다. 스페인어로 ‘순례자’라는 뜻이다. 기자도 뻬레그리노가 돼 대전가톨릭평화방송(사장 백현 신부)이 마련한 ‘산티아고 100㎞ 도보 성지순례’에 동행했다. 대전교구 설정 70주년과 평신도 희년을 맞아 추진된 특별 기획 순례다. 10월 22일부터 11월 3일까지 진행된 순례에는 28명이 참여해 사리아(Sarria)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구간까지 110여㎞를 걸었다. 2회에 걸쳐 취재 동행기를 싣는다.
■ 나를 내려놓는 길
산티아고까지의 순례길에는 여러 경로가 있다. 프랑스 국경 생장 피에드포르에서 떠나는 ‘프랑스 길’(Camino Frances), 스페인 남부 세비아에서 출발하는 ‘은의 길’(Via de la Plata), 이베리아반도 북쪽 해안을 따라가는 ‘북쪽 길’(Camino del Norte),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시작하는 ‘포르투갈 길’(Camino Portuguese) 등이다. 그 중 프랑스 길이 가장 유명하다. 9세기까지 유일한 순례길이었던 면에서 신앙적으로도 유서가 깊다. 대전가톨릭평화방송 순례단이 걸은 구간도 이 프랑스 길 중에 있다. 이 길 전체는 800여㎞에 이르지만 최소한 한 달 정도의 기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시간 여건이 되지 않는 이들은 중간부터 걷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순례단은 부모와 함께 온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에서부터 칠순 기념으로 참여한 어르신, 또 개신교 신자까지 다양하게 구성됐다. 저마다의 동기는 달랐지만, 순례길을 통해 바쁜 일상을 내려놓고 ‘하느님 안에서 나를 돌아보자’는 의지는 같았다. 스페인 도착 후에는 몬세랏, 사라고사, 로욜라, 부르고스 지역을 순례하며 순례자의 자세를 가다듬었다.
10월 25일 순례 하루 전, 순례단은 레온에서 순례자 증명서(Credential del Peregrino)를 발급받았다. 순례자 증명서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이들에게 필수다. 순례자 숙소를 이용하거나 식당에서 순례자 메뉴를 이용하는 데 필요하다. 또 방문하는 지역마다 도장을 받도록 돼 있어 종착점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입성 전 100㎞ 이상 걸었다는 표시가 된다. 이 증명서를 통해 순례 마지막에 완주 증명서가 발급된다. 자전거로는 200㎞ 이상을 이동해야 한다. 아무 구간이나 100㎞를 걸어서는 안 되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의 마지막 구간을 순례해야 한다. 최소한 100㎞는 걸어야 순례를 증명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사리아와 포르토마린 순례길 사이에 있는 100㎞ 표지석. 지금부터 산티아고까지 100㎞가 남았다는 것을 뜻한다.
산티아고 순례길 둘째 날 출발지인 포르토마린에서 순례단이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10월 27일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에 앞서 순례단이 포르토마린 성니콜라스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 겸손을 배우다
10월 26일 드디어 사리아에서 순례가 시작됐다. 산티아고에서 100여㎞ 거리에 있는 사리아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 중 시간이 많지 않은 이들이 출발지로 삼는 곳이다. 그래서 순례 성수기에는 많은 순례자로 북적인다.
옅은 안개가 서린 날씨 속에 모두가 설렘과 기대, 걱정 속에 뻬레그리노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앞으로 산티아고까지 5일을 걷는 일정이다. 가이드가 동행한다 해도 모두 긴장되는 초행길이다. 매일 20㎞ 정도의 거리를 걸어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과연 갈 수 있을까’, ‘하루에 몇 시간을 걸어야 하나’, ‘중간에 포기해도 될까’ 몇몇 말 없는 표정들 속에서 고민이 읽혔다.
순례단이 걷는 구간은 스페인에서도 비가 많이 내리는 갈리시아 지역이었다. 5일 동안 하루만 빼고 비가 흩뿌렸다. 비가 오지 않더라도 날씨는 변화무쌍했다. 안개가 꼈다가, 흐렸다가, 어느새 햇볕이 내리쪼였다. 사흗날 아침에는 날씨가 10도 이하로 급강하해서 함박눈이 내리기도 했다.
길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가파른 언덕이 나타나는가 하면 시골길, 초원길, 진흙길, 고속도로 옆 오솔길, 보도 블록길, 자갈길까지 등장한다.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음을 배울 수밖에 없다.
길가에서 마주치는 마을과 성당들은 순례자들 발길이 이어지면서 조성됐다. 프랑스 길 전체에 100개가 넘는 마을이 있다. 고단한 순례자들이 쉬고 기도했던 곳들을 지나며 수많은 시간 동안 조개 모양 표시를 따라 걸었던 신앙 선조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순례단 중에는 매일 걷기 운동을 하며 몸을 만든 이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많다보니 첫날 오후부터 여기저기서 허리·다리 등의 통증을 호소했다. 하루 순례 목표에 도달하려면 보통 오전에만 12~15㎞를 걸어야 했다. 평소 단련하지 않았던 몸에 이상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날이 지날수록 순례를 방해하는 ‘복병’은 더 많아졌다. 초반에 속도를 자신하며 서두르다가 못 걷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하고, 잘 맞았던 신발이 말썽을 일으켜 순례길이 고통길로 변하기도 했다. 만나는 지점을 확인하지 못해 일행을 놓치는 경우도 있었다. 각자 걷지만 일정한 시간 내에 함께 움직이는 길이어서 너무 빨리 걸어도, 너무 늦게 걸어도 안 됐다.
많은 것이 마음먹은 것처럼 되지 않는 산티아고 순례길. 절제와 겸손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스페인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