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는 믿지 않는 이들까지도 당신 사업의 도구로서 이용하십니다. 그가 악하거나 선하거나 하느님께선 당신 뜻대로 그들을 사용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의 하느님도 되시며 세상 모든 것이 결국 당신의 것이요 당신께 속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7세기에 유대 나라는 타락할대로 타락되어 있었습니다. 왕과 지도자들은 썩어 있었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이 등장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벌을 내리시는데 이때 이방인의 왕인 느부갓네살을 당신의 도구로 쓰십니다.
느부갓네살은 바빌로니아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쳐들어와서 모든 것을 때려 부쉈으며 시 전체를 완전히 쑥밭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백성 모두를 포로로 끌고 가서 혹독한 노예생활을 시켰습니다. 느부갓네살은 하느님을 믿지는 않았지만 하느님의 도구로서 유대 민족을 사정없이 후려쳤습니다.
뿐만아니라 유대인들이 포로생활에서 고생을 하며 많은 반성을 하자 그들을 노예생활에서 건져준 것도 고레스라는 이방인의 왕이었습니다. 고레스도 하느님을 아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가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줍니다. 그는 비록 우상 숭배자였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해방시키는데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왜 믿지 않는 이들을 사용하셨느냐? 그들도 결국 하느님의 것이요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 소련의 지도자였던 고르바초프를 보면서 그는 분명 하느님의 도구로써 이 시대에 큰일을 했었음을 보았습니다. 독일이 통일되고 동구가 자유화돼 우리와 국교를 맺는 등, 세상이 이처럼 180도 바뀌게 된 것은 고르바초프의 뛰어난 역할 때문입니다. 그 역시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하느님의 도구로써 하느님께서 선택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습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무엇이 하느님의 것이고 무엇이 카이사르의 것입니까?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올가미로 묶어두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속셈들이 다 허사로 돌아가자 이번엔 정치적인 문제를 가지고 옭아매려고 했습니다. 즉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옳지 않으냐’하는 것입니다. 이 말엔 굉장한 책략이 들어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조국은 로마의 식민지로써 갖은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로마에 세금을 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대단히 큰 모욕적인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 로마에 반기를 드는 엄청난 사건이 됩니다. 이렇게 해도 예수님은 걸리게 되어 있었고 저렇게 해도 예수님은 빠져나갈 문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진퇴양난의 험난한 길을 그냥 뚫고 지나가십니다. 한마디로 넘어가십니다.
예수님께선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세금으로 바치는 돈을 가져오라고 하시며 돈에 새긴 초상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이 카이사르의 것이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참으로 명쾌한 대답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교묘한 술책을 아무 장애 없이 그냥 넘어 가십니다. 성서에 보면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그 말씀에 경탄하면서 예수를 떠나갔다고 했습니다. (마태 22,22 참조).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무엇이고 하느님의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하느님의 것이고 무엇이 세상의 것입니까?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다 하느님의 것이요, 선한 이도 악한 이도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악에서 선을 일으키시고 선의 향상을 위해서 악을 이용하기도 하십니다. 악의 존재는 그래서 ‘필요악’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드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바치지 않는다면 마귀가 하느님의 도구로서 모든 것을 다 빼앗을 것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면 그만큼 마귀의 지배에서 고통 받아야 하며, 정의를 실천하지 못하면 불의한 심판을 우리 스스로 불러들이게 됩니다. 선하게 살고 사랑하며 삽시다. 그것이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삶의 봉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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