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연한 순교자들의 역사 이면으로 사라져야 했던 배교자들 중 하나인 최해두가 쓴 고백서 「자책」(自責)은 외압에 의해 신앙을 버리겠다고 선언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배교자들의 양심적 갈등과 회개를 위한 처절한 삶의 몸부림을 오늘날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최해두(崔海斗)는 1784년 교회 창설 직후에 영세 입교했던 신앙 선조 중 한 사람이다. 최해두는 그의 처사촌인 윤유일의 권고로 입교해 정약종, 황사영, 최창현 등 교회 지도급 인물들과 함께 교회일에 참여했고 주문모 신부와도 여러 차례 만나 성사를 받았다.
오늘날 준주성범으로 일컫는 「경세금서」(經世金書)와 같은 수준 높은 한문신심 서적을 읽으며 신앙을 다져온 최해두는 1801년 신유박해를 피해 피신했으나 연좌율에 따라 그의 부친이 체포되자 즉시 자수를 했다.
그 후 최해두는 심문과정에서 배교했고 그해 5월10일 유배형을 선고받고 경상도 홍해로 귀양을 갔다.
귀양생활을 얼마나 했는지는 모르지만 귀양생활이 시작된 지 5~6년 후 최해두는 부모의 부음을 듣고서도 장례를 지내러 가지 못했고 자신도 귀양지에서 사망했다.
부친의 부음을 듣고 홍해로 가서 시체를 거두어 묻은 최해두의 아들 최영수는 1839년 기해박해가 터지자 체포돼 옥중생활을 이겨내고 교수형을 받고 순교의 영예를 차지했다.
‘두루 심란 답답하여, 두 어 줄 글을 기록하노니, 슬프고 슬프도다’로 시작하는 최해두의 「자책」은 배교로 인한 유배생활을 통해 자신의 과오를 정개하고 평생 지속되는 순교적 삶을 바꾸고자 했던 회심자의 통렬한 회개의 심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스스로를 꾸짖는 ‘자책’을 제목으로 새로 태어난 자신의 삶과 믿음을 전하기 위해 붓을 들어 책을 쓰기 시작한 최해두는 신망애 ‘천주 삼덕’과 ‘십계명’을 자세히 해설하여 회개의 새 삶을 실천하는 윤리적 기준으로 삼고자 했다.
“죄를 범한 즉 주의 은총이 없어지고 진절(眞切)통회를 졸연(卒然=갑작스레)히 얻기 어려우니 한번 머리를 땅에 대고 한번 가슴을 두드리며 아! 죄, 아! 죄구나. 대죄라 한들 죄를 죄어 주모(主母)의 성심을 상하게 한줄, 이 마음에 아프지 아니하면 무슨 통회되며 통회 진절치 아니하면 어찌 단단한 정개의 마음을 얻으랴”하며 자책하는 최해두는 자신의 죄로 천주 성심을 상하게 한 것을 뼈저리게 통회한다고 고백한다.
최해두는 천주 삼덕의 은혜를 중시 여겨 “죄근(罪根) 을 끊지 못함은 신덕(信德)이 없는 탓이라. 만일 신덕이 단단하여 주명(主命)이 위에 계셔 강림하신 줄을 여암은 살 먹은 아이만치나 여길진대 어찌 방자함이 있으리요?”하고 “신망애 삼덕 중에 신덕이 없으면 망덕이 어데로 쫓아 나며 신덕과 망덕이 없으면 애덕이 어데로 쫓아오며 신망애 삼덕이 없으면 어데로 향하여 공부를 부치리요”라며 천주삼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천주삼덕을 설명한 최해두는 “주를 굳게 믿어야 굳게 바랄 것이요, 알뜰히 사리 사랑하온 마음이 발하여야 죄단(罪端)이 없을 것이어늘, 이제 나는 생각을 극진히 하여 참신을 찾지 아니 하고 겨우 남의 말만 듣고 입교를 하여거니 어찌 입공개과(立功改過)에 날랜 마음이 있으리오”라며 자신의 나약한 믿음을 탄식한다.
「천주십계」의 해설로 회개한 자신의 새 삶의 실천적 기준을 제시한 최해두는 천주만을 마땅히 섬겨 흠숭할 것을 맹세한다.
배교자 최해두가 자신의 배교로 인한 고뇌와 갈등을 신앙으로 승화시킨 참회의 글로 한글로 쓰여진 「자책」은 떳떳한 우리의 신앙과 유산으로 순교자들의 찬연한 역사 이면으로 사라져야 했던 많은 배교자들의 신앙적 고뇌와 영적 자책의 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최해두의 「자책」은 한국 교회사 연구소에서 편찬한 「순교자와 증거자들」 안에 현대 맞춤법에 따라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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