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데라의 트로크라본부 구호요원은 엘리자베스, 글라라, 반스, 스티븐 등 모두 4명. 이들 중 엘리자베스와 글라라(여·42)는 트로크라의 멤버다. 반스(아일랜드인·29)는 지하수 개발 기술자로 1년간 계약으로 5개월째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스티븐 역시 구호업무를 위해 고용한 사람으로 그는 케냐인이었다.
트로크라가 구호활동을 펼치고 있는 곳은 게도지역의 일부로 남쪽 다마세에서부터 북쪽으로는 돌로마을까지 1백60km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 동쪽 바와고 마을까지는 62km. 이들 지역을 구역(Secta)별로 6개의 공동체로 묶어 주민들의 자립을 위한 구호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일행이 도착한 4일은 마침 게도지역 내의 주민 대표들과 워크숍이 열리는 날이었다. 오후 3시가 가까워 오자 20여 명의 주민대표들이 속속 모여 들었다. 즉석에서 원형으로 회의장이 만들어지고 곧 이어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병원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많은데 필요한 약품이 절대 부족해 어려움이 많다.” “현재 몇 군데 파놓은 지하수로는 농장에 댈 물이 충분치 못하다”
워크숍이란 다름 아닌 각종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현재까지 진행 중인 상황과 문제점들을 보고하고, 대책 및 개선책을 토의하는 자리였다. 지하수 개발, 영농, 의약품, 건축, 교육 등 각 분야에 관계된 문제들이 낱낱이 거론됐다. 이날 2시간을 넘게 계속된 워크숍에서 그들의 얼굴은 진지하다 못해 심각함까지 엿보였다. 비록 이들의 바람이 기본적인 식량문제가 해결된 상태에서 나오는 성급한 요구와 불만이라 하더라도, 모든 희망을 상실한 채 극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으리라 예상했던 우리에게 그 모습은 조금은 충격적이었다.
9월5일 인근 만데라성당에서 주일미사에 참례한 일행은 11시 반경 케냐와 소말리아 국경을 통과해 게도지역으로 들어갔다. 양국 경비대가 국경을 지키고 있었으나 별다른 제재는 받지 않았다.
공중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지상의 상황은 예상대로 참혹했다. 나뭇가지에 풀잎을 얹어 만든 움막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주민들이 여기 저기 서성대고 있었다. 무슨 구경거리라도 생긴 양 새까만 아이들이 우리가 탄 차 주위로 몰려들었다.
난민촌 가운데는 물건을 파는 상점들도 눈에 띄었다. 역시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이곳에 조잡한 과자, 땔감용 나무, 파리가 들끓는 죽은 가축 고기 등이 손님을 기다렸지만 물건을 사는 사람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먼저 찾은 곳이 소위 여성복지센터. 20여 명의 여성들이 멍석 같은 것을 짜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모쓰’라고 부르는 이런 토산품을 비롯해 여러 가지 생필품을 만들어 팔기도 하고 쓰기도 한다. 대부분이 내전으로 남편을 잃은 여성들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카이루병원’의 상황은 형언키 어려울 지경이었다. 진료를 기다리는 50~60여 명의 주민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응급실·수술실·분만실이라고 붙은 팻말이 무색할 만치 구비된 의료장비는 약간의 거즈와 소독약, 기본적인 수술 도구가 고작이었다. 수술실에선 질투를 부렸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얻어맞은 한 여인이 마취도 안한 상태로 찢어진 귀밑의 상처를 꿰매고 있었다.
마당에 쳐놓은 천막은 아마도 입원실용인 듯 했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린것에게 가죽뿐인 가슴을 물린 채 쓰러져 있는 여인. 온통 얼굴을 뒤덮고 있는 파리떼를 쫓아낼 힘도 없어 그저 눈만 껌벅이고 있는 노인네. 저것이 살아있는 인간의 몰골일까. “꼭 허락을 받고 사진을 찍으라”는 안내원의 말도 잊은채 카메라를 들이대자 질겁하고 손을 가로젓는다.
게도지역 내의 트로크라 캠프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후 벨렛하와마을 주변에 위치한 농장을 찾았다. 농장이래야 2~3백평 남짓한 소규모 시범단지. 바나나·토마토 등이 주요 작물이다. 웅덩이에서 펌프로 지하수를 끌어올려 물을 대는 모습이 이곳에서는 신기하게만 보인다.
돌아오는 길에 난민 1천5백여 세대가 밀집해 있다는 말말리마을에 들렀다. 이곳은 두 달 전 만델라로부터 재이주해 온 난민들이 형성한 마을. 최근에는 반군들의 폭거로 22명이 피살돼 아직도 총성이 멎지 않은 곳임을 실감케 했다. ‘호리’라고 부르는 이들의 움막집은 3평 남짓한 내부공간에서 일가족 7~10여 명이 함께 생활한다고 한다.
소말리아 방문 마지막 날인 6일 아침, 뜻하지 않은 소식이 우리 일행을 긴장시켰다. 인근 벨렛하와 지역에 회교 반군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들이 나타나, 접근이 어렵다는 통보였다. 전날 수도 모가디슈에서는 유엔평화군으로 파병 중이던 나이지리아군 병사 7명이 무장괴한들에 의해 피살됐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1시간 반쯤 지났을까. 현지 주민으로부터 회교 반군들이 사라졌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가는 길 내내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으나 “근본주의자들과 트로크라의 관계가 우호적이어서 만약의 사태에도 큰 염려는 없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이날 방문지는 게도지역 북부에 위치한 돌로마을. 다와강을 사이에 두고 에티오피아와 맞대고 있는 곳이다. 황량한 벌판을 3시간 가까이 달려 도착한 마을은 폐허 그대로였다. 77년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간에 일어난 ‘오가딘전쟁’ 때 파괴된 흔적이 그대로 늘려 있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혀 복구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듯 했다.
곳곳에 부서진 건물들의 잔해가 흉측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 보였고, 온갖 배설물이 즐비한 땅바닥에서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다와강가에는 이런 저런 사정에는 아랑곳없이 어린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물장구치는 모습도 보였다.
3일간의 방문일정을 마치고 귀환하는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 본 소말리아는 마치 인간들의 근접을 용인하지 않는 거대한 절벽처럼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직도 광란의 살육이 계속되고 있는 수도 모가디슈보다는 나은 편”이라고 하니 그곳의 상황은 도대체 어떨까. “미래조차 기약할 수 없는 체념과 절망, 인간으로 하여 빚어질 수 있는 비극의 극치만이 존재할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을 해보며, 그래도 이곳은 재건의 힘찬 삽질이 있었고 그들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적지 않은 위로를 안겨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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