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7일 소말리아 게도지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나이로비는 우리 일행이 처음 도착하던 날 느꼈던 것과는 엄청나게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도 나이로비는 아프리카의 천국”이라는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국제도시라는 곳이 이 정도인가”라던 의구심이 어느새 ‘천국’ 운운하게 되다니. 사람의 마음이란 게 이렇게 간사한 것일까.
여독(旅毒)을 풀 겨를도 잠시, 다음날부터 시작될 수단 방문 준비에 서둘러야만 했다. 이날 오후 수단 구호활동을 위한 국제 원조단체인 ‘SEOC’와 ‘NSCC’ 나이로비 사무실을 방문, 수단 내전의 상황과 여러 원조기구들의 구호활동에 대해 들었다.
집권 회교도 아랍인들과 기독교도 흑인들 사이의 10년 가까운 내전으로 1백만명 이상이 사망한 수단은 곳곳에 전쟁고아들과 살 길을 찾아 헤매는 난민들로 들끓고 있다.
수단은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북부와 대부분 기독교도 흑인들인 남부로 크게 나눠져 있으며 북부는 정부군이, 남부는 ‘SPLA’(수단 인민해방군)이 각각 장악, 10년째 소모전을 계속하고 있다.
딩카족을 중심으로 한 남부 흑인들이 인구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북부 이슬람 세력에 무력저항을 시작한 것은 56년 남부의 독립을 요구하면서부터. 72년 자치를 인정받아 한 때 내전이 중단되기도 했으나, 83년 수단정부가 회교율법을 선포하자 내전이 재개됐다.
그러나 내전의 근본원인은 기독교 흑인 중심의 남부 지역이 북부 이슬람계와 종족·종교·문화적으로 동화되기 어렵다는데 있다. 여기에 교육경제 등 전반에 걸쳐 북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돼온 남부 기독교인들의 불만이 회교율법 확대실시를 계기로 폭발한 것이다.
이 같은 내전의 수렁에서 양측은 주민들을 볼모로 세력전을 벌이고 있어 주민들의 굶주림을 더하고 있다. 특히 존 가랑이 이끄는 수단 인민해방군(SPLA)이 장악하고 있는 수단 남부 주민들은 무관심과 방치. 약탈의 대상이 되어 기아의 대부분이 이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다. 게다가 2년전 또 다른 반군단체인 ‘SPLA United’가 결성, 반군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면서 남부 주민들은 이중 삼중의 살상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형편이다.
회교 정부의 강권통치가 강화되면서 가톨릭을 포함한 기독교계와의 관계도 극도로 악화된 실정. 수단 내 가톨릭 교구는 수도 카르툼대교구와 쥬바대교구를 비롯해 엘 오베이드, 말라칼, 와우, 룸벡, 얌비오, 예이, 토리스 등 모두 9개. 이 가운데 ‘얌비오’와 ‘예이’교구를 제외하고 ‘쥬바’와 ‘토릿’교구 지역까지 이미 회교 정부군이 장악했다(교구 분포도 참조).
예이교구도 아직 SPLA세력이 반수 이상이나 시내 주요 거점은 정부군이 장악했으며, 2만여 명이던 교구 신자들도 대부분 탄압을 피해 떠나고 남은 신자는 70여 명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반정부 인사로 지목돼 오던 토릿교구장 주교는 현재 로마에 피신중이며 롬벡교구장 주교 역시 나이로비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오는 11월 수도 카르툼에서 개최예정인 수단 주교회의에도 토릿 롬벡 얌비오 교구장 등 3명의 주교가 참석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수단 최남단에 위치한 ‘니뮬레’(Nimule)에 도착한 것이 8일 오전 11시경. 3시간가량의 비행 끝에 다다른 상공에서 내려다본 니뮬레지역은 소말리아와는 전혀 딴 세상이었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나일강을 끼고 온 대지를 가득 덮고 있는 푸른 초원은 마치 거대한 휴양지를 보는 듯 했다. 한 폭의 상큼한 수채화에 비길 만큼.
니뮬레를 포함한 수단 남부지역은 원주민들과 과격한 회교집단의 강권통치를 못 이겨 남으로 남으로 이주해 온 기독교도 난민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또 이곳은 반정부군인 수단 인민해방군(SPLA)이 장악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성 패트릭 선교회 사제인 죤 신부(아일랜드인)와 수단교회연합(ZSCC)소속의 닉(영국인), 그리고 일단의 수단 청년들이 우리 일행을 맞았다. 우리는 곧바로 ‘NSCC’ 현지 캠프로 안내됐다.
수단교회연합(The Sudan Council of Churches)은 니뮬레지역에서 구호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크리스천 공동체들의 연합체. NSCC의 현지 책임자 넬슨씨는 “NSCC가 자체의 개발 프로그램을 갖고 있지는 않고, 다만 각 지역 혹은 교회의 요청에 직접적으로 지원해주기보다는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적절한 파트너를 찾아줌으로써 여러 구호단체와의 연계를 주선해 주는 것이 주요 임무”라고 말했다. NSCC는 국제 까리따스, CAFOD(영국 천주교 해외 원조기구), SEOC 등 여러 국제 원조단체들과 협력관계를 맺고 있었다.
‘SEOC’(수단 긴급 구호단체 연합·Sudan Emergency Organization)은 그동안 제각각 이루어지던 각국 단체들의 수단 구호노력을 한곳으로 결집시키기 위해 지난 91년 결성된 국제 원조기구들의 연합체다. 국제 까리따스, CAFOD, WCC(세계교회협의회) 등이 여기에 속해 있으며, 긴급 식량원조가 주요 임무다.
8일 오후, 첫 방문지로 향하는 우리 일행들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워져 있었다. 햇살이 따갑긴 했지만 화창한 날씨에 아마도 초록일색인 니뮬레의 자연경치가 평안함을 느끼게 했으리라. 진흙을 빚어 만든 집들은 제법 안정감이 있어 보였다.
군데군데 움푹 팬 비포장도로틀 30여 분간 달려 도착한 곳이 ‘결핵요양소’. 머리가 천정에 닿을 듯이 덜컹대는데도 “그래도 이 길이 고속도로”라는 말에는 어이가 없었다. 이러니 수송체계가 제대로 돼 있을리 만무하다. 결핵요양소라고 온 곳이 다 부서진 건물 1개동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칠이 벗겨진 외벽과 망가진 창틀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이곳에선 자비의 성모 마리아 선교수녀회의 베로니카 수녀(우간다인)가 남자보조사 10여 명과 함께 하루 약 2백여 명의 환자를 돌보고 있다. 내부를 둘러보는데 파리 떼가 극성이다. 짐승의 우리도 이보다 못할까. 목덜미로 무언가 슬금슬금 기어오르는 것 같아 더 이상 머물기가 힘들었다. 뛰쳐나오다시피 건물 뒤로 나오자 뒷마당엔 20여 명의 환자들이 땅바닥 여기 저기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누더기 같은 천조각 하나로 몸을 감싼 채로.
카메라를 들이대도 별 반응 없이 무덤덤하게 바라볼 뿐이다. 수치스러움도 없는걸까. 절망의 끝에서 생기는 뻔뻔스러움. 그렇다. 정작 무서운 것은 가난이나 남루함이 아니다. 그로 인해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포기하게 만드는, 절망의 끄트머리에서 생겨나는 뻔뻔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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