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으로 인해 국가조직은 물론 전통적인 가족(가정)단위까지 철저히 붕괴됐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수단 인민해방군(SPLA)에 차출돼 전장에 나가 죽거나 아니면 포로가 됐지요. 내전이 끝날 것이라는 어떠한 희망도 지금으로선 가질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수단교회연합(NSCC)의 현지 책임자 넬슨씨의 다분히 비관섞인 말이다. 그는 또 ‘니믈레’ 지역에만 약 10만여 명의 난민들이 있고, 인근 아스와(ASWA)지역에 4만여 명, 페이저(PAGER)에 8만여 명 등 수단 남부지역에만 30여 만명이 넘는 난민들이 모여 살고 있다고 설명했다.
‘니믈레’에서 20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한 로아(LOA)성당은 내전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외형은 비교적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평지 가운데 우뚝 서있는 로아성당은 주변에 펼쳐진 푸른 초원과 어우러져 사뭇 평화로운 느낌마저 들게 했다.
수단 인민해방군의 통제하에 있는 이 지역은 원주민들 중 절반 이상이 내전과 기근을 피해 우간다 등지로 이주해 갔고, 현재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절반가량은 또 수단내의 타 지역에서 이주해 온 난민들이다. 1947년에 지어졌다는 고딕형식의 로아성당은 주일이면 4~5백명의 신자들이 나온다고 한다. 수단사람 챨스 아퀼레 신부가 이들을 사목하고 있었다.
로아성당에서 만난 이곳 주민들은 한결같이 “이런 세상에서 사는 것이 죽느니만 못하다”고 말했다. “전쟁이 모든 것을 앗아갔습니다. 이곳은 그래도 안전은 별문제가 없지만 ‘쥬바’ 지역만 해도 이슬람 세력들의 압력을 심하게 받고 있어요. 외국인 선교사들은 모두 쥬바지역 밖으로 쫓겨났고 수단인 신부들과 교회만 근근이 존속해 있지만 사정은 말이 아닙니다”
로아성당이 운영하고 있는 ‘교사학교’는 14~17세가량의 청소년 10여 명이 수업을 받고 있었다. 이들을 지도하고 있는 메리놀회 낸시 수녀는 “이제 시작한 지 두 달이 채 못 됐다”면서 초등부 1·2·3학년 정도는 가르칠 수 있는 교사로 양성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교육문제가 가장 시급한 과제”라는 말과 함께.
돌아오는 길에 수단 재해복구단체(SRRA)가 운영하는 병원에 들렀다. 수단 재해복구단체는 수단 인민해방군이 수단재건을 기치로 내걸고 조직한 단체. 따라서 이 병원 역시 수단 인민해방군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셈이다. 간간이 군복차림을 한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병원이라고 해야 전날 보았던 결핵요양소와 별로 다를 바 없었다. 내전으로 인한 사상자들이 주로 수용돼 있는 이곳은 노르웨이와 아일랜드의 구호단체 ‘GOAL’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퉁퉁 부어오른 발목이 아마도 부러진 듯 보였지만 까맣게 때 묻은 압박붕대만이 감겨 있을 뿐이다. 쾨쾨한 냄새 때문인지 호흡이 가빠졌고 어디를 가나 달라붙는 파리 떼가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그들의 생기 잃은 눈빛은 계속되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기대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더욱 심각한 문제”라는 어느 안내원의 말이 귓전을 파고든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이러한 불행이 주어져야 하는가”라는 단순한 물음만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아스와’ 난민촌에선 아이들 몇이 나를 보고는 다가서려다 슬그머니 도망치듯 물러났다. 아마도 내 표정의 그 무엇이 그들을 겁나게 했음이 틀림없으리라.
수 단 방문 마지막 날인 10일에는 니믈레성당 인근의 학교와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사우(SAU)마을을 방문했다. 니믈레학교는 6개 학급에 학생 수가 9백여 명으로 꽤 큰 규모다. 모두가 초등학교 과정. 이 학교 교사 모니까 수녀는 “아이들이 쓸 공책과 교실, 유니폼이 가장 시급하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3백여 명의 주민들이 작은 부락을 이루고 있는 ‘사우’ 마을에서 우리 일행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토속춤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이들이 성당 겸 학교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 흑판에는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요’ ‘수단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자’ ‘수단에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기를’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주민들의 소박하고도 간절한 바람을 읽을 수 있었다.
캠프로 돌아오는 길에 들린 한 학교에서 그곳 아이들이 들려준 노래는 더욱 가슴을 파고들었다. 갓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 또래의 아이들 10여 명이 여선생의 선창에 따라 이렇게 노래 불렀다. “신부님, 가시거든 저희들을 기억하세요. 저희들을 잊지 마세요”라고.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과 신기함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부르는 이들의 처량한 목소리에 우리 일행은 북받쳐 오르는 애처로움을 누를 길 없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우리는 저마다 창밖을 쳐다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를 기억하세요” “우리를 잊지 마세요”라는 아이들의 애절한 목소리만 귓전을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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