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인문주의자들의 왕자로 일컬어지는 에라스무스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성직자의 서자로 태어나 당시 학자가 되고자 하는 누구나 학습하고자 했던 유명한 인문주의 학교에서 우수한 교육을 받았다. 1486년 엠마무스의 아우구스띠노 수도참사회에 입회하여 1492년 사제가 되었다. 그는 수도자요 사제로서 고대문학에 대한 열광자였다. 인문주의 공부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라틴어와 희랍어 공부에 몰두하여 후에 모국어보다 라틴어를 더 잘하게 되었다. 그는 인문주의자들을 만나고 필사본을 찾아보기 위해 수도원을 떠나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독일 등 유럽의 여러곳을 여행하였다. 그는 토마스 모어나 죤 피셔, 죤 콜레트 등 제후들, 주교들과 갈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친교를 맺으며 인문주의 공부를 충실히 하였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미련함의 찬미」(Laus Stultitiae, 1511)에서 에라스무스는 세상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그는 교회 고위 성직자들의 교만함 등 교회와 신앙생활의 폐해, 사회 모든 계층의 부도덕함과 모순 등에 대하여 신랄한 풍자로 비판하였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른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이 도처에 많은 재산을 가지고 그 세속적인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세속적인 무기를 쓰는 비복음적인 생활을 고발하였다. 이에 앞서 쓴 「그리스도 병사(兵士)의 소교본(小敎本)」(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 1504)에서 성직자들의 무지, 탐욕, 부패, 미신적인 신심행위를 통박하였다. 그러나 이 책의 근본정신은 교회의 전통적인 보화, 즉 복음정신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정신에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에라스무스의 생애 중 더 중요한 것은 그의 편집활동이었다. 그는 고대 작가들, 특히 교부들의 많은 저서들을 유럽의 여러 인쇄소에서 출판하였는데 가장 유명한 작품은 신약성서 전반에 대한 비평을 포함해서 1516년에 출판한 그리스어 신약성서이다. 에라스무스는 그리스도교적인 교육, 결혼, 전쟁과 평화, 루터파의 혼란 등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한 글도 썼다. 그의 모든 작품을 통하여 드러난 그의 의도는 종교와 문화를 정화하여 인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성서의 원전과 성서를 올바르게 해석하도록 하는 교부들과 같은 원천에로 돌아감으로써 신학을 새롭게 하고자 하였다. 그는 신학의 유일한 목표가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고 인간을 회개시키는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 초점 없는 토론에 시간을 할애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신약성서의 입문에서 복음이 모든 언어권의 모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했다. 산상수훈에 입각한 그리스도교적인 생활, 즉 복음의 순박한 정신대로 살면 참된 지혜를 발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교회가 전통의 이름으로 보존하고 있는 여러 관습들 가운데 본질적인 요소가 아닌 것을 과감히 폐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복음의 핵심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폐해는 제거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소가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 또 종교가 지난 많은 과오로부터 정화된 영적인 종교에로의 귀환이 필요하며, 고대 작가들 가운데서 발견된 모든 좋은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권유하였다. 마지막으로 종교란 진실하고 완전한 우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에라스무스는 정치제도를 복음의 원리에 따라 운영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자인 제후들은 마땅히 이러한 방향으로 교육받아야 한다. 그는 평화를 수호하는데 대단한 열성을 보였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싸운다는 것은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결속은 불화를 중재하여 정의를 구현하고 평화를 도모하는데 그 힘을 발휘케 하여야 한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어느 상황에서나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단으로 단죄된 사람들에게도 폭력을 사용하지 말고 더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고립을 시키며 시간을 두고 기다리는 관용을 요구하였다. 옛 전통의 가치를 무차별적으로 거부하며 폭력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강요하는 개혁파도 거부하며, 동시에 전통의 비본질적인 타성화된 관습을 수호하려는 가톨릭의 독선도 질책하였다.
결국 그의 평화를 위한 그의 중도(中道)적인 태도가 양측 모두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하여간 에라스무스는 교회의 평화로운 개혁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성서의 정신에 입각한 그의 개혁안은 영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르틴 루터가 등장하였다. 그는 라이프 찌히 종교 토론회 이후 루터에게 관심을 가지며 같은 인문주의자로 여기고 그를 격려하였다. 처음에는 루터의 교회개혁에 대한 열망을 호의적으로 받아 들였으나 루터의 유명론적 회의론에 의한 신학사상과 요란스럽고 격렬한 처신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 그는 「자유 의지론」(1524)에서 자연과 이성(理性)에 대한 루터의 신학사상을 비판하였다. 이때부터 두 사람 사이의 학문적인 논쟁이 시작되었고 이 논쟁을 통하여 서로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초기 인문주의자들은 에라스무스의 노선을 따르게 되어 루터와 결별하게 되었다.
에라스무스에 대한 평가도 역시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평화로운 해결을 위한 그의 중재노력을 높이 평가하는가 하면 교리적인 확신을 갖추지 못하고 양측의 눈치를 살피면서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했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의 저서 전체를 통하여 드러난 핵심사상은 성서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정신으로 돌아가서 단순 소박하게 생활하면 참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루터와 같은 분열의 혁신보다는 용서와 화해를 통한 평화로운 쇄신을 추구하였다. 그의 사상은 그의 원의와는 상관없이 후대 개혁가들의 기초를 이루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