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도 상점도 사람들도 많은 곳, 서울의 명동에는 그만큼 돈도 많고 자선을 구하는 이도 많다.
진안실씨(시몬·48세)도 명동에서 바구니를 놓고 자선을 구하는 그 많은 이들 중의 하나지만 이곳을 자주 오가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궁금증을 일으키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체 없이 상체로 걸어 다니는 그의 신체적인 모습도 모습이지만 신발을 신어도 발을 동동거릴 만큼 차가운 땅 바닥에 앉아 독서삼매경에 빠진 그의 모습은 벌써부터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책 읽는 아저씨’이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지만 장애인에다 가정형편까지 어려웠던 진씨는 아예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마구잡이식’으로 한글을 깨치긴 했지만 배움과 문학에 대한 진씨의 갈증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컸다. 지금 비록 ‘앵벌이’를 하고 있지만 그는 여기서 얻은 돈으로 중고상에 직접 찾아가 책을 고르는 사치를 누리고 있기도 하다.
이런 낭만적인 그에게 엄격하게 다가서는 현실은 ‘가장 멸시했던’ 구걸행위를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지만 길거리로 나서기까지 겪어온 삶의 굴곡을 그래도 진씨는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한다.
3살 때 두 다리가 모두 소아마비에 걸린 데다 어릴 적 옥상에서 떨어져 척추마비까지 당해 중증 장애인이 된 진씨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고 가정형편도 어려웠다.
“18세 때 집을 나와 고아 아닌 고아가 됐지요. 가정형편도 형편이지만 형제들이나 부모님께 짐이 되기 싫어서였습니다. 복지시설에도 가 있곤 했지만 나 혼자의 힘으로 자립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자립은 생각처럼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때수건 장사에서부터 할 수 있는 일은 다해봤다. 먹고 싶은 것 안 먹고 하고 싶은 것 안하면서 한푼 두푼 모은 돈을 몽땅 사기 당했을 때 진씨는 죽으려고 수면제를 사 모으기도 했었다.
“그러나 맘대로 안됐어요. 살아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합니다”
89년부터 명동거리로 나선 진씨는 거리에서 만나는 뜻하지 않은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현재 서울 마천동 1평 안팎의 나무판자집에서 혼자 살아가고 있다.
낡은 책들이 가득한 그의 방엔 그에게 따뜻한 온정을 베푸는 이웃에 대한 감사의 시 한편이 표구돼 걸렸다.
「눈이 오는 날/깡통을 앞에 놓고/한 닢 동전을 기다리면서/생각한다./한 닢 동전은 돈이 아니라/눈을 녹여주는 불꽃덩이/내 마음속에/흩날리는/눈밭을 녹여주는/작은 불꽃덩이/··· 이하 생략」
삶이 고달파 지난 과거의 일을 정확하게 기억할 수조차 없는 진씨가 몇 년 전인지 모르지만 본보 독자면에 실었던 ‘작은 불꽃덩이’란 시의 한 구절이다.
“지금까지 나만을 생각하며 숨 가쁘게 살아온 내 자신은 정말 초라합니다. 자선을 베풀어주신 분들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작은 자선이라도 남을 생각하는 마음은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자립하게 되고 방 한 칸이라도 마련하게 되면 장애인 공동체를 마련해 지금까지 남에게 받고만 살았던 은혜를 베풀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좋은 글도 쓰면서요”
언젠가는 명동거리에서 벗어나 매스컴을 통해 사랑의 손길을 베풀어준 이름 모를 그 많은 사람들에게 큰 절을 올리고 싶은 것이 진씨가 가진 작은 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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