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가장 태진(17세)이는 올 겨울나기가 더 추울 것만 같아 내심 걱정이다. 지난 달 말로 4년간 계속해오던 신문배달을 그만둔 것이 당장 생활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동생 태준(14세)이 면회도 가봐야 할테고 태현(10세)이 노트라도 한 권 사 주려면 그래도 십만원은 수중에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취로사업을 나가던 할머니도 요즘은 일거리가 시원찮아 쉬는 날이 더 많다.
서울시 강동구 하일동 376-118번지. 빼곡히 몰려있는 집들이 마치 닭장을 연상케 하는 이곳에 3평 남짓한 태진이 가족의 보금자리가 있다. 어렵긴 했지만 서로 의지하며 살던 태진이네는 88년 4월 어머니가 가출하면서 불행은 시작됐다. 어머니는 평소 주벽이 심한데다 폭행을 일삼는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그해 막내 태현이의 생일날인 4월5일 집을 나가버렸다. 파출부, 식당일 등으로 가족의 생계를 이끌던 어머니는 그날도 어렵게 태현이의 생일상은 마련했지만 술에 취한 아버지가 상을 엎어버리자 마음이 몹시 상했었다고 한다. 결국 그 날 밤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이후 날마다 술로 마음을 달래던 아버지마저 화병 끝에 90년 2월 병원치료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고, 초등학교 6학년이던 태진이는 졸지에 소년가장이 돼버린 것이다. “아버진 술만 마시면 노래 부르며 집에 오곤 했어요. 멀리서 아버지 목소리만 들리면 저희는 미리 도망치듯 나가버리곤 했지요. 엄마가 집을 나간 것이 아버지 때문이라는 생각에 밉기도 했습니다”
이때부터 태진이와 7살 막내 태현이는 신문배달에 나섰고 할머니 김두례(79세)씨는 취로사업에 나갔다. 매달 동에서 지급되는 쌀과 생활보조비, 신문배달로 버는 돈을 모으면 우선 끼니걱정은 덜었으나 이것도 동생 태준이의 탈선으로 여의치 못했다. 일찍부터 본드에 손을 댄 태준이는 걷잡을 수없이 나빠져 절도, 폭행 등으로 수차례 선도시설 신세를 졌다. 지난 11월 ‘아들의 집’(경기도 파주)에 들어간 태현이는 내년 4월에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태진이는 10월 8일 다니던 고덕중학교에 자퇴서를 냈다. 수업일수가 모자라 졸업이 힘들다는 학교 측의 권유도 있었지만 스스로도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검정고시를 준비할까 하지만 학원수강료가 부담이 돼 망설이고 있다.
태진이에게는 3가지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어릴 적 꿈이었던 태권도와 검정고시 공부, 그리고 컴퓨터학원에 다니는 일이 그것. “아버지와 같은 인생을 걷기 싫어서”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태진이에게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다. 막내 태현이(고덕국교 3년)는 “불쌍한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기 위해 의사가 되는 것이 장래 희망”이라고 말했다.
3년 전 취로사업 도중 청소차에 치어 왼쪽 팔을 다친 김두례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어미도 제 새끼가 보고 싶으면 언젠가 찾아오겠지”라며 연신 눈물을 글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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