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는 역사의 산물이라고 한다. 역사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막아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야기 시켰거나, 그 흐름의 방향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사건들의 대부분이 우연히 일어나지는 않는다. 역사적인 대변혁이 일어났던 그 이면에는 이미 그러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도록 여건이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의 하나라 손꼽히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분열·종교개혁도 위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흔히 ‘면죄부’로 오역된 ‘대사(大赦 Indulgentia)’ 문제를 종교개혁의 결정적인 원인처럼 단순하게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대사문제는 종교개혁의 여러 동기중의 하나이며, 오히려 정치·경제·사회·문화, 특히 종교적인 요인들이 서로 어울려져, 소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있었다고 본다. 서유럽의 제반 상황이 거의 비슷했지만 유독 독일·스위스 지방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다른 국가에서는 그렇지 못한 까닭이 무엇일까? 그리고 영국에서는 다른 형태의 종교분열이 일어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종교개혁 운동이 순수하게 종교적인 차원에서만 설명될 수 없는 종교외적인 요인도 비중 있게 고려되어야 함을 알게 한다.
프랑스는 봉건 군주제에서 절대 군주제로 전환되어가고 있었다. 국가의 제반 권력이 왕 한 사람에 의해서 행사되는 권력의 중앙집권화는 왕명을 거스르는 어떠한 분파적인 행위가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왕권 절대주의적인 추세는 프랑스 교회에 대한 로마 교황의 개입을 제한하고 왕의 간섭을 확대하려 하였고, 이러한 경향이 후에 정치·종교적인 국수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갈리카니즘(Gallicanis-mus)으로 드러났다. 따라서 프랑스에서는 비록 종교적인 분야에 있어서도 왕명을 거스른 분파적인 집단행위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장미전쟁(1455~1485)이후 영국에 민주주의의 요람으로 평가되는 상·하원제도의 국민대의기관이 있었으나, 역시 강력한 통일국가를 지향하면서 왕권 절대주의체제 확립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왕의 뜻에 반하는 여하한 종교적인 분파를 허용치 않았고, 결국 왕의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성공회가 탄생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아라곤 왕 페르디난도(Ferdinando)와 까스띨랴여왕 이사벨라와의 결혼(1469)으로 이루어진 스페인의 통일은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오래전부터 영국의 의회와 같은 꼬르떼스(Cortes)라는 국민대의기관과 레온(Leon)이라는 대헌장도 있었으나 절대주의적인 왕권강화정책으로 유명무실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교회법상 일종의 특권인 교황으로부터 승인된 식민지 선교를 위한 보호권(Pad-ronado)을 행사하면서 국내적으로는 국교회(國敎會)의 수장(首長)처럼 행세하였다. 따라서 왕의 뜻에 반대하는 어떠한 종파적인 처사도 용납될 수 없었다.
이러한 중앙집권적인 전제군주정치 체제의 정책은 전체의 공동선에 입각한 평화 공존보다는 자국의 이익과 자기 왕조나 혈통의 기득권 수호 내지는 확산을 추구했고 이에 반대되는 어떠한 가치도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성 로마제국으로 불렸던 독일지방은 위의 세 나라와 정치적인 상황이 아주 달랐다. 즉 지방분권적인 봉건 제후들의 부족국가 연합체와 갈은 형태였다. 엄연히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라는 신분이었지만 합스부르크가(Habs-burg家) 직속 영지(領地) 이외에는 그의 황제권한이 명실상부하게 통용되지 않았다. 유럽 각지에 흩어져있는 왕가의 영지확보와 세력유지에 더 큰 힘을 쏟은 나머지 신성 로마제국의 통치권 강화와 대내적인 통합은 취약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황제의 명령도 각 제후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거부될 수도 있었고, 각 제후들은 자기네들의 영지내에서 어느 정도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오히려 군주들은 자기네들의 영지에서 절대권을 행사하려는 경향이 있었으며, 그들의 배후에는 그러한 군주권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법률가들이 있었다. 그리고 제국의회와 황제에 의해 승인된 법은 신성 로마제국의 법이 되었지만 법 시행에 이해관계가 있는 제후들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유명무실하게 된 경우도 많았다.
위와 같은 정치적인 상황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하고 그를 보호했던 제후의 이해관계가 그의 개혁운동을 지속할 수 있게 된 큰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위와 갈은 국가별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면 국가별 종교개혁의 분포도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무릇 역사란 우연히 한 사람의 영웅호걸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복합적인 여러 요인과 익명의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준비되어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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