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1,7-16)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라자로가 죽게 되었다는 전갈을 받으신 후 예수의 반응은 얼핏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그 소식을 받으시고 이틀이나 거기에 머물러 계셨고 이틀이 지난 후에 불쑥 제자들에게 유대아로 가자고 재촉하셨다. 이틀간 머무신 다음 사흘만에 행동을 취하신 것은 요한 복음서에서 가끔 언급되는 것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다음 사흘날에 부활하신 것을 암시하는 문구이다. (대목 41 참조 : 요한 4,40,43)
“유대아로 가자”라는 재촉 말씀은 예수께서 마지막 날을 보내시고 잡히시기 전에 실의에 빠진 제자들을 재촉하시며 “자, 일어나 가자”라고 하신 말씀을 연상케 한다(요한 14,31 : 마태 26,46). 두 경우 다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이번 경우는 유대아로 가면 혹시 체포될지 모른다는 제자들의 공포심이 표출되었고 실제로 그곳에 가서는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광경이 주위 사람들에게 표징으로 제시된다. 이것은 물론 십자가 죽음을 당하시고 사흘날에 부활하실 주님의 부활을 미리 암시하는 기적이지만 예수께서 전교여행을 하실 때에 사마리아에 이틀동안 머무신 후 갈릴래아로 가서 가파나움에 있는 고관의 아들을 다시 살리신 기적(요한 4,43 이하) 즉 생명을 주는 기적과 단계적인 연관성을 생각할 수 있다.
예수께서 유대아땅을 밟은 일은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유대아인들과 부딪혔다(요한 2,13 : 5,1 : 7,14). 특히 최근에는 유대아인들이 예수를 돌로 쳐죽이려고 했고(요한 10,31) 예수께서는 그들의 납치를 피하여 요르단강 건너편으로 피신하였던 것이다(요한 10, 40). 이러한 사정을 직접 보고 알고 있던 제자들인지라 다시 유대아로 가자고 하실 때 제자들은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이것이 마지막 유대아 방문이 될 것이며 동시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완수하는 결정적인 결단의 시작이 될 것이다. 이 일을 빛이 있는 동안 해야 한다. 한낮은 활동하는 시간이고 그 시간은 열두시간이다. 낮에 활동하는 동안은 사람이 살아 있는 값어치를 하는 시간이다. 밤이 오면 일을 못하게 되는 것이니 빛이 있는 낮은 활기 있고 자유로운 때이며 밤은 어두움의 기간이니 암흑에 쌓여 자유를 빼앗기는 때이다. 낮은 예수께서 복음을 전파하는 때이며 예수 자신이 빛이 되어 세상을 비추는 때이다. 이제 악마가 세력을 떨치는 암흑의 밤이 오기 전에 일을 해야 한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두움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 9,5 : 12,46) 라고 하신 말씀을 상기시키기라도 하듯 “자, 가자”라고 재촉하신 것이다. 이제 낮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곧 밤이 오면 걸려 넘어질 것이다. 예레미야서에 “어두워지기 전에 주 하느님께 영광을 올려라. 어두움이 오면 네 발이 산길에서 걸려 넘어질 것이다”(13,16)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예수의 말씀을 예언한 말씀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그 암흑의 세력과 맞부딪히기 위하여 사지(死地)를 향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 있어서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고 곧 부활이다. 이 구원의 묘리를 상징하는 친구 라자로의 죽음과 소생을 사람들에게 예징(豫徵)적으로 보여 주시려고 제자들을 재촉하신다. 제자들은 주님이 사랑하시는 라자로를 살리려고 그곳에 갔다가 변을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는 말씀을 실천하시려는가 하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라자로가 잠들었다면 살아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씀 올렸다. 가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는 뜻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병자가 잠을 자면 쾌유된다는 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몰이해를 깨우쳐 주시려고 라자로는 죽었다고 말씀하시고 그 죽음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또 그 아들의 영광도 드러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것을 제자들도 믿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가자”라는 말을 또 하신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제자 중 디디모스라고 불리는 토마스가 나서서 “우리도 함께 가서 생사를 같이 합시다”(로마 6,8 : 코린후 5,14). 토마스는 아라메아어로 쌍둥이라는 뜻이다. 토마스는 12사도 명단에 끼어있고(마태 10, 3 : 마르 3, 18 : 루가 6, 15 : 사도1, 13)요한복음서에서 세 번 언급된다(11,16 : 20,24 :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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